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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한국] 전반홀이 끝나갈 무렵 안개처럼 비가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승부는 크게 갈리지 않았고 아직 복수를 하지 못한 후배의 전의를 불태우는 말투에는 의욕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끝까지 가는 겁니다."

그늘집 옆은 후반홀을 시작할 카트가 모여서 대기하는 곳입니다. 다음 홀로 갈 카트들이 순서대로 줄을 지어 서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그곳으로 갔을 때 대기한 카트가 없었습니다. 이제 내리기 시작하는 비 때문에 미리 짐을 꾸리나 봅니다. 

앞산 풍경은 구름과 안개에 싸여서 마치 선경을 보는 듯합니다. 비 오는 날이나 비가 갠 여름날 풍경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그것은 도시의 건물 속에서 바라보는 풍경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우리는 우산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망설임 없이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처럼 후반홀을 시작했습니다. 캐디는 무전기를 통해 이야기하면서 간혹 투덜대는 말투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모두 게임에 집중하면서 우산을 쓰고 걸으며 서로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홀을 더할수록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있었습니다. 장갑이 젖어서 새로운 장갑으로 바꾸면서 여분의 장갑을 가지고 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홀에선가 뒤 돌아보니 뒤따르던 팀이 안보였습니다. 

동문끼리 모임이라 세 팀이 차례로 출발했는데 우리 뒤를 따르던 2번 조가 홀 아웃한 것 같습니다. 캐디에게 물어보니 후반홀 시작할 때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홀 정산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우리 팀 중 누구도 홀 정산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레터럴 워터 해저드(병행 해저드)가 그린 주변까지 펼쳐진 홀이었습니다. 물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원을 만들고 만들어진 원을 또 다른 빗방울이 덮치고 있었습니다. 연잎도 물을 모으는 정겨운 풍경의 호수는 감싸는 물안개와 주변의 나무가 어울려 빗속에서 요정이 나올 것처럼 신비로워 보였습니다.

미처 우산을 가져오지 못한 나는 후배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비를 피해서 어깨를 마주하고 살짝 겹쳐지는 자세로 걸었습니다. 빗소리가 우산을 두드립니다. 잔디에 떨어지는 빗물은 소리 없이 땅으로 스며듭니다. 잔디는 물을 머금어 더 푸르고 싱싱합니다. 우산 속으로 전해지는 빗소리가 약간 울림을 주는 듯합니다.

 "비 오는 날 언제 이렇게 걸어 보겠어요?"
후배의 목소리는 우산 속에서 더 잔잔하게 전해옵니다. 배수구 쪽에 고인 물은 황토가 섞여 있습니다.

15번 홀에 오르자 비는 제법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 앞쪽의 상황을 말해야겠군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으니 타수는 썩 좋지는 못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14번 홀에서 선배는 버디를 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보기를 했으니까요. 보기를 한 선배 친구는 예전에 우중 골프를 치면서 있었던 일화를 얘기해 주었습니다. 버디 한 친구에게 '비 오는 날 먼지 나듯이 맞았다'고 그리고 오늘도 맞고 있다고. 

문제는 15번 홀이었습니다. 파 5홀이었는데 그렇게 길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골프코스가 짧다고 꼭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딘가에는 보이지 않는 핸디캡을 숨기고 있기 마련이니까요. 어둠 속에서 주둥이를 벌리고 있는 짐승처럼 말이지요. 

드라이버를 약간 경사진 곳으로 친 후배는 계속 실수를 합니다. 마치 산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홀로 힘들고 험난한 곳을 찾아다닙니다.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을 혼자서 갈 때가 있습니다. 의도치 않게 날아간 공을 찾아 나서다 보면 광야에서 홀로 서서 사탄의 무리와 맞선 그분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동반자들은 모두 그린에 올라가 있는데 러프나 벙커에서 나 홀로 있을 때 심정 말입니다. 후배는 그 홀에서 혼자 양파를 했습니다.

17번 홀에서 마침내 후배는 드라이버를 날려 버렸습니다. 연습 스윙한다고 휙 던졌는데 드라이버가 30m는 날아간 것 같습니다. 레이디 타석 부근까지 날아갔으니까요. 

우중 골프에서 자주 발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장갑을 자주 바꿔줘야 합니다. 양피 장갑은 평소에는 밀착감이 좋지만 물에 젖게 되면 밀가루 반죽처럼 풀려서 점점 녹아 버릴 것만 같습니다. 비 오는 날에는 연습장에서 끼던 합성피혁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여벌을 갖고 있으면 더욱 좋을 듯합니다. 

빗줄기는 더 세게 내렸고 우리가 그린에 공을 올렸을 때 그린은 물바다가 되어있었습니다. 홀 쪽이 더 낮은 곳이었는지 홀 주변은 웅덩이처럼 물이 고여 있었고 물속의 홀은 작은 어항 같았습니다. 버디를 했던 선배는 홀에 넣을 때까지 하자고 했습니다. 컨시드는 없다고. 물속에서 공을 쳐본 적 있습니까? 아무리 세게 쳐도 물 앞에서 공은 멈춰버립니다.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고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고 끝날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60cm 남은 버디 선배의 공만 남았습니다. 

공은 물이 차서 흥건해진 자리에 있었습니다. 선배는 반쯤 잠긴 볼을 걷어 올리듯 쳤을까요? 홀은 수중에 잠겨있고 공은 멈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공은 물속에서 유영하듯 어항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집을 찾아 들어가듯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빗물에 젖어있었고 비는 더 세차게 내렸지만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환상적인 퍼팅과 어항으로 들어간 물고기를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으니까요.

우리의 우중 골프는 수중 골프로 끝났습니다. 어쩌면 또다시 이런 상황이 올는지 모르겠습니다. 네 명의 동반자가 모두 즐겁게 골프를 끝내야 성공한 라운드라고 말합니다. 우리 네 명은 모두 즐겁게 자리를 떴고 다음날까지 소셜미디어 단체방에서 댓글을 달았습니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즐겁게 떠들었던 그날 골프는 오랜 기간 회자될 것 같습니다. 

라운드 후에 저녁을 겸한 술자리에서 모두 모여서 떠들고 있었습니다. 후배 한 명이 일어나더니 몇 번 홀에서 공을 주었는데, 공에 글이 쓰여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곤 큰소리로 외치듯 말합니다.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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