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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대결
그건 결국 그들의 마지막 맞대결이었다. 50년 전에 벤 호건과 샘 스니드는 '셸 원더풀 월드 오브 골프'를 지켜보는 수백만 명의 골프팬들을 매료시켰다. 어느새 쉰 살을 넘긴 전설적인 두 선수는 빛나는 샷을 보여줌으로써 챔피언스 투어의 시를 뿌리는 데 일조했다.
By Al Barkow
그건 어떤 면에서 세기의 매치였다. 기나긴 골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선수가 18홀 스트로크 플레이에서 맞대결을 펼쳤다. 그리고 닐슨 미디어리서치의 집계에 따르면 347만 명이 TV를 통해 이 대결을 지켜보면서 당시로서는 골프 중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하긴 벤 호건과 샘 스니드가 정면승부를 펼친다는데 누군들 보고 싶지 않겠는가?


셸 원더풀 월드 오브 골프는 1961년에 처음으로 전파를 탔다. 이 시리즈는 9년간 계속됐고, 이후에 다시 부활해서 1994년부터 2003년까지 세계 전역의 코스에 이름 있는 선수들을 불러놓고 경쟁을 붙였다.

하지만 모든 대결이 열여섯 번의 메이저 우승과 PGA 투어 146승을 합작한 호건과 스니드의 경우처럼 막강한 매력을 발산했던 건 아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대회에서는 테드 크롤과 첸 칭-포, 그리고 제이 허버트와 플로리 반 동크가 실력을 겨뤘다.

하지만 진 리틀러와 바이런 넬슨이 파인밸리에서 맞붙은 1962년 매치처럼 잊을 수 없는 중계로 남은 경우도 있었다. 호건-스니드 매치는 사실상 전시 행사, 일종의 팬서비스였다. 그리고 큰 상금이나 명예가 걸린 것도 아니었다. 이기면 3,000달러를 받고 지면 2,000달러를 받았다. 그린 재킷이나 화려한 트로피도 없었다. 신문의 스포츠 면에 몇 줄 실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상징적이거나 그 밖의 다른 의미까지 퇴색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엄청난 존재감과 선수로서 쌓은 전적(당대의 다른 프로 선수, 그리고 서로간에)을 감안한다면, 호건과 스니드는 인디애나주 먼시의 시립 코스에서 구슬치기를 했더라도 가장 무심한 골프팬의 관심마저 사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존심이 세고 승부욕이 강한 이 두 선수가 메이저 대회처럼 매치에 임하리라는 건 기정사실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1964년 5월 휴스턴 컨트리클럽에서 진행되고 이듬해에 전파를 탄 이 매치는 골프계의 두 골리앗이 경쟁에서 만난 마지막 시합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물론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지만, 이 시합은 골프계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됐다.


여기서 살짝 밝히고 넘어가자면, 셸 원더풀 월드 오브 골프 당시 나는 젊은 기자였다. 평생의 직업이 된 이 일을 처음 시작한 지 불과 2주가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출격한 곳이 거기였다.

이 행사는 당시 셸USA의 회장이자 골프광이었던 먼로 스페이트의 아이디어였다. 스페이트는 이렇게 중계용으로 기획된 최초의 일대일 링크스 시리즈인 ‘올스타 골프’의 파생프로그램을 고안했던 것이다. 올스타 골프는 시카고의 유명한 퍼블릭 코스 운영자인 조 젬섹과 그의 파트너인 피트 드멧의 작품이었다. 이 시리즈는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정상급 프로들(스니드와 진 리틀러, 캐리 미들코프, 줄리어스 보로스, 그리고 토미 볼트를 비롯한)의 18홀매치를 방영했는데, 대부분은 젬섹 소유의 코스에서 펼쳐졌다. 흑백 방송의 제작 수준은 낮았다. 홀 배치도는 어린이용 색칠공부 책에서 뜯어낸 것 같았고, 날아가는 볼을 카메라로 잡아내는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

선구적이었지만 미숙했던 이 방송에 대해 젬섹 본인도 “우리는 가정용 홈비디오를 촬영하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스타 골프는 적잖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 성공에 주목한 스페이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셸 시리즈는 가능한 세계 전역의 유명한 코스에서 매치를 진행하고 컬러 필름에 담기로 했다. 그는 저명한 골프 기자인 허버트 워렌 윈드에게 자문을 구했다. 윈드는 기본적인 포맷을 정하고 플레이할 코스들을 제안했다. 그리고 1920년대와 1930년대를 풍미했던 진 사라젠을 진행자로 섭외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사라젠은 골프용 반바지에 말쑥한 스포츠 재킷과 셔츠, 타이, 그리고 파나마모자까지 쓴 채 카메라 앞에 섰다. 스페이트는 젬섹의 기획을 더 발전시켰고, 그건 소기의 효과를 거뒀다. 좀처럼 대중 앞에 서지 않는 호건을 불러낸 것도 행사에 광채를 더했다.

1946년부터 1953년까지 메이저 9승을 기록했던 벤 호건은 1960년대에 들어 은둔하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 한 해에 고작 네 번의 대회에 출전하는 게 전부였다. 전설적인 지위에 따른 특혜, 이를테면 코스 디자인과 TV 해설, 또는 자신의 이름을 단 토너먼트를 만드는 것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는 언젠가 호건에게 투어 선수로서 엔터테이너라는 자의식을 지녀본 적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의 대답은 짧고 분명했다. “아니요.” 그런 호건이 이렇게 요란한 행사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셸은 최강의 카드를 쥐었고, 무표정하면서도 늘 대중을 매료시켜온 호건은 이번에도 관심의 중심에 섰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호건이 누구의 편의를 봐준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1955년에 창업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골프용품 회사를 지탱하려면 언론의 홍보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돈도 필요했다. 그가 출전 명목으로 2만5,000달러를 따로 챙겼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그걸로 직원들의 급여를 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스페이트는 관례를 깰 의지가 있었고, 그 외의 다른 선수들은 오로지 상금과 비용만을 받았다.


샘 스니드는 호건만큼 특별하거나 비싸지 않았다. 이 매치가 진행될 무렵, 영원한 강타자 샘은 여전히 투어에서 활동 중이었고(심지어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쉰세 번째 생일을 두 달 앞두고 열린 1965년 그레이터 그린스보로오픈에서는 자신의 여든두 번째이자 마지막 투어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스니드는 플레이하는 걸 좋아했고, 호건과의 대결을 특히 더 좋아했다. 언젠가 그 이유를 “그는 어쩌다 한 번 ‘자네가 어웨이네’라고 말하는 걸 제외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호건은 평소의 모습을 고수했다. 휴스턴 매치 때에도 그들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플레이는 하늘이 잔뜩 찌푸린 아침 9시에 시작했고, 많은 비가 내릴 거라는 예고가 있었다. 비는 두 번째 홀 도중에 시작됐지만 불굴의 선수들은 플레이를 계속했다.

3번홀에서 티샷을 했을 때 텍사스 특유의 강렬함을 동반한 천둥번개가 들이닥쳤다. 플레이를 중단해야 했고 호건과 스니드를 포함한 몇 명은 프로숍 바로 옆방으로 몸을 피했다. 호건은 어깨에 타월을 덮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반면에 스니드는 가만히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입담이 대단했던 그의 이야기는 금세 호색에서 외설로 수위를 높였다. 그때 그 방에 우리와 함께 있었던 기록요원 에드나 포드는 정숙한 아일랜드 여자였고, 모린 오컷은 아마추어 챔피언 출신으로 40년 전에 <뉴욕 타임스>에서 골프를 담당하면서 미국 최초의 여류 스포츠 기자가 된 선구자였다. 오컷에게서는 20세기 초의 예의범절 느낌이 풍겼지만, 스니드는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바나나를 들고 음란하게 흔들어댔다. 그가 암시하는 이야기들이 숙녀들을 곤혹스럽게 한 건 말할 나위가 없었다. 호건은 어정쩡한 미소만 간신히 짓다가 밖으로 나갔다.

우천으로 인한 경기 중단은 4시간 정도 지속됐다. 파53번홀에서 플레이가 재개됐을 때, 호건이 먼저 샷을 했다. 그의 4번 우드샷은 그린에 올라 홀 7.5미터 앞에 멈췄다.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놀라워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대기를 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폭발적인 샷을 할 수 있는 걸까? 그날(11번홀까지 간신히 마쳤을 때 날이 어두워져서 더 이상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과 그 다음 날까지 호건은 단 한 번도 페어웨이를 벗어나지 않았고 완벽한 그린 적중률을 과시했다. 어프로치샷은 단 한 번도 홀에서 7.5미터 이상 떨어지지 않고 대부분은 훨씬 안쪽에 안착했다. 마치 정확한 볼 스트라이킹과 샷 컨트롤의 전시회장 같았다.

그걸 보여준 사람의 나이는 쉰한 살이었다. 호건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페이드샷을 구사한 건 단 두 번뿐이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골프계의 전략가는 드로샷에 치중해야 하는 레이아웃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두 사람이 어떤 샷을 어떤 클럽으로 했는지 확인해서 사라젠과 캐스터인 조지 로저스에게 전화로 알려주는 것도 내가 맡은 일 가운데 하나였다. 파5 12번홀에서 나는 호건이 웨지로 샷을 할 거라고 예측했다. 내가 “웨지?”라고 그에게 말했더니 그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퀄라이저”라고 대답했다. 그건 호건 브랜드를 단 피칭웨지에 그가 붙인 이름이었다. 마이크 앞에 앉은 로저스는 호건이 쥔 클럽을 “그의 이퀄라이저”라고 언급했다. 자신의 회사 홍보, 바로 그것이었다.

호건의 놀라운 샷메이킹에 유일하게 흠집을 낸 것은 선수생활 후반부에 그를 괴롭혔던 퍼팅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자신감으로 모든 풀스윙에 임했던 그가 퍼팅을 할 때는 한없이 시간을 끌면서 미동도 없이 서 있었기 때문에 잠이 든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텍사스의 골프팬들은 이렇게 소리쳤다. “아이고 벤, 그냥 그걸 뒤로 잡아 빼요. 바보 같이 시작도 못하네.”


스니드도 대단히 우아한 발레 같은 스윙을 선보이며 좋은 플레이를 펼쳤다. 그는 연장전에서 맞붙었던 세 번 모두 자신이 호건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말하길 좋아했는데, 그 중 한 번이 1954년 마스터스였다. 휴스턴에서는 스니드가 4번홀까지 1타 앞섰고, 9번홀에서는 1언더파로 호건과 동타가 됐다. 하지만 스니드는 고향 출신을 응원하는 갤러리의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는 당당한 플레이로 화답했다. 짧은 파4 7번홀에서 그는 왼쪽 도그렉 모퉁이에 서 있는 큰 나무를 드라이버샷으로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간신히 파세이브에 성공했다. 이미 수없이 목격했던 호건의 볼스트라이킹에는 동요하지 않았지만, 스니드는 이틀에 걸쳐 열린 매치에서 그를 능가하지 못했다. 12번홀에서 버디를 하면서 호건은 한 타 차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69대 72타로 승리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매치는 비록 수준이 높다고는 해도 단순한 일회성 행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새로이 출현해서 오래 지속될 어떤 것의 서막이었다. 셸이 1970년에 시리즈를 마감했을 때 프로듀서였던 프레드 라파엘은 새로운 시도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10년 후에 그는 정규 투어에서 은퇴한 쉰 살 이상의 투어 프로들을 위한 대회를 만들었다. 스포츠계에 과거를 동경하는 향수가 만연하던 때였다. 라파엘은 지미 드마레, 줄리어스 보로스, 돈 재뉴어리, 그리고 당연히 샘 스니드 같은 나이든 스타들을 위한 뭔가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휴스턴 행사 때 똑같이 쉰한 살이었던 호건과 스니드가 너무나 멋진 플레이를 펼쳤던 걸 기억했고, 다른 베테랑 선수들도 팬들에게 보여줄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다. 라파엘은 1976년 마스터스에서 오랜 친구인 사라젠을 만나 이런 생각을 피력했다. “전설들이 샷을 할 때가 됐군.” 사라젠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스니드, 바이런 넬슨과 함께 1번홀의 티박스로 시구를 하러 갔다. 1978년에 라파엘은 제1회 레전드 골프 토너먼트를 촬영했는데, 2인 베스트볼 매치로 기획된 첫 대회에서 스니드는 마지막 세 홀에서 버디를 하며 파트너인 가드너 디킨슨과 함께 호주의 피터 톰슨, 켈 네이글 조를 물리쳤다.

이 중계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1980년에는 시니어 PGA 투어를 거쳐 지금의 챔피언스 투어가 되는 첫 대회가 열리게 됐다. 라파엘의 천재적인 아이디어는 오거스타 내셔널에서 반짝였을지 모르지만, 결국 골프계의 궁극적인 멀리건으로 통하는 투어를 낳은 건 휴스턴 컨트리클럽에서 펼친 호건과 스니드의 한판 승부였다.



자료제공골프매거진


입력날짜 : 2015-08-12 09:5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