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대회 제84회 마스터스 토너먼트에 출전한 타이거 우즈가 4라운드에서 경기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골프한국] 동물의 왕국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느긋하게 하품을 하며 어슬렁거리며 걷는 것을 보았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이 느리지만 자신감 있어 보이는 수사자의 걸음. 그가 걷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보다 동물 같은 느낌을 받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결국, 193cm의 큰 키로 오거스타를 휘젓고 다니던 더스틴 존슨은 2020 마스터스의 그린재킷을 입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가을에 개최된 2020 마스터스 토너먼트는 디펜딩 챔피언 타이거 우즈가 대회 2연패를 달성하고 투어 최다승을 경신할 것인지 이목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날 '아멘 코너'(11~13번 홀)인 12번 파3 홀에서 10타를 치면서 '양파' 이상 세지 않는 아마추어 골퍼들에게 '셉튜플 보기'(Septuple bogey, 7오버파)라는 새로운 골프 용어를 선물해 주는 것으로 마스터스를 마감해야 했다. 

타이거 우즈의 셉튜플 보기는 골퍼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다. 

골프가 누구도 예외 없이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일대 사건이었고, 설령 그가 '골프 황제'라도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걸 잠시 동안 상기시켜주었다. 

오직 마스터스에 대비해 모든 스케줄을 맞춰왔던 타이거에게는 치욕적인 순간일지 모른다. 골프의 가차 없음을, 야멸참을 느끼면서 그가 9번째 퍼팅한 공이 홀 옆에 멈추는 상황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켜봐야했다. 

갤러리가 없는 오거스타 내셔널은 화면 속에서도 아름다웠다. 

봄날의 목련도 철쭉도 없었지만 선수들을 향해 열려있는 페어웨이와 트인 정경은 삭막해 보이는 링스 코스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산속의 골프장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만의 정서 때문인지 모르지만 잘 정돈된 잔디나 유난히 하얀 벙커는 그린의 색상과 잘 어울렸다. 

갤러리는 없어도 대회마다 티잉 그라운드를 병풍처럼 두르던 광고판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져서 그랬는지 하늘 높이 길게 자란 나무는 제각기 모습을 완연하게 보여주었다. 해가 비취는 곳에 가끔 길게 늘어난 나무 그늘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의식적으로 역광으로 촬영한 선수들의 스윙 모습은 큰 나무 저편의 햇빛 때문에 순간 눈이 부시기도 했다. 

드론을 띄워서 내려다보는 홀은 숲 속의 산책로나 숨겨진 정원처럼 아늑해 보였다. 꽃과 나비가 없었고 알록달록 단풍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거스타 내셔널이 미국의 전통을 또 한 페이지 만드는데 손색이 없어 보였다.

▲2020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대회 제84회 마스터즈 토너먼트에서 준우승한 임성재 프로가 4라운드 경기를 마치고 우승을 차지한 더스틴 존슨과 인사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어쩌면 이번 마스터스는 3라운드에서 결정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라운드가 끝났을 때 더스틴 존슨은 16언더파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2위 그룹은 애브라함 앤서, 임성재, 캐머런 스미스가 12언더파로 선두와는 4타 차이가 있었다. 

2위 그룹을 형성한 선수 중에 세계랭킹 1위를 압박할 만한 선수가 보이지 않았고 저스틴 토마스(-10), 존 람(-9), 로리 맥길로이(-8)가 뒤쫓고 있었으나 타수 차가 있어 우려할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조심할 것은 선두를 유지하다 무너진 경험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뿐이었으리라.

한국인 최초로 마스터스 챔피언 조에서 출발한 임성재는 표정이 밝아 보였고 자로 잰 듯한 티샷을 보여 주었다. PGA 투어 우승이 없는 애브라함 앤서는 중압감 때문인지 자꾸 벙커로 공을 빠뜨렸고 스스로 무너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앞 조에서 플레이하는 캐머런 스미스가 트러블 상황에서 멋진 샷으로 그린에 올리고, 경사를 타고 홀 근처로 오는 공을 보면서 이변을 기대하기도 했다. 

약간 조급했던 더스틴 존슨이 보기를 하던 상황에 임성재가 버디를 하면서 초반에 타수 차를 좁혀갈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적어도 6번 홀에서 더스틴 존슨의 버디에 임성재의 짧은 1.2m의 파 퍼팅이 들어갔다면 그 기대는 이어졌을지도 몰랐다. 홀을 살짝 비켜간 그 홀의 보기는 승리를 염원하는 마음을 차갑게 식게 만들었다. 

그리고 더스틴 존슨은 더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길게 멀리 치고 정교했으며, 칼처럼 예리하게 그린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터치로 유리 그린을 공략하면서 자신의 플레이에 더함도 덜함도 없이 묵묵히 지나갔다. 정상에 서서 부음하는 사자처럼 깊은 눈빛으로 홀을 바라보고 확신에 찬 몸짓으로 스윙을 하고 오거스타의 페어웨이를 지나갔다.

홀이 끝나는 시점에 광고를 내보려고 화면이 정지할 때가 있다. 굵은 소나무와 연못을 비추면서 컨트리풍의 노래가 잠시 나오다 광고로 넘어가곤 한다. 이 노래가 뭔지 궁금해 찾아봤는데 '오거스타의 테마송'이라고 한다.

   "목련꽃 피는 오솔길에 봄이 찾아오면
    오거스타에 사람들이 모여드네
    누가 일요일 오후에 그린재킷을 입을까요
    누가 이 노래를 부르며 18번 홀 페어웨이를 걸을까요
    오거스타 층층나무 소나무가   
    노래처럼 내게 말을 걸어오네

    아 ~  내가 사랑한 오거스타
    아 ~  내가  못 잊어 그리운 오거스타여"


오거스타와 마스터스는 미국의 자랑이고 전통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새로운 도전을 했고 또 새로운 한 페이지가 새겨졌다. 

디펜딩 챔피언 타이거 우즈가 그린재킷을 입혀주자 "타이거가 그린재킷을 입혀준 것은 굉장하고 놀라운 일이다. 이 옷을 입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더스틴 존슨이 말했다.

목련과 철쭉꽃 향기를 맡으며 수많은 갤러리의 환호성 속에 펼쳐졌던 마스터스 대회가 스크린 골프장의 화면처럼 시작하고 막을 내렸다. 내년에도 마스터스는 계속될 것이고 '오거스타의 전설' 역시 그러할 것이다.

추천 기사: 고진영·김세영·박성현·이정은6, 이번주 펠리컨 챔피언십 출격 [LPGA]

추천 기사: '마스터스에서 물오른' 임성재, RSM 클래식 우승 사냥 [PGA]

추천 칼럼: '슬로 플레이어'를 위한 변명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저작권자 © 골프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