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THE CJ CUP(이하 더CJ컵) 3라운드까지 54홀 선두를 달린 러셀 헨리. 사진제공=Getty Image for THE CJ CUP


[골프한국] 골프 중계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납니다. 골프 용어도 겨우 외우기 시작할 때 아나운서나 해설자의 설명을 들으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많은 선수의 이름은 도저히 외울 엄두도 나지 않았죠. 겨우 타이거 우즈나 필 미컬슨 정도 기억하는 수준이었으니까요. 그건 축구나 야구의 유명선수의 이름을 외는 정도의 상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쉐도우 크릭 골프 코스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더 CJ컵 대회를 TV를 통해 아내와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작년 이맘때 제주도에서 열린 CJ컵 나인브리지 대회는 갤러리로 참관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필 미컬슨, 저스틴 토마스를 응원하며 따라다녔습니다. 축구나 야구장의 관중은 좌석표를 받지만 골프는 입장권만 구매합니다. 어디든 다닐 수 있고(선수나 주최 측의 사람들이 있는 공간은 줄을 쳐서 제한합니다) 어떤 선수를 쫓아다니든 자유입니다.

골프의 관중은 '갤러리'란 표현을 씁니다. 흔히 전시회에 온 사람들이 벽면을 따라 전시된 작품을 보기 위해 줄지어선 모습과 카트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진 관중의 모습이 닮아 보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올해부터는 코로나 19 때문에 갤러리 없는 골프 중계를 봅니다. 수많은 갤러리에 싸여서 경기하던 선수 입장에서 좀 서운할지 모릅니다. 휑하니 뚫린 홀을 중계방송으로 볼 때 처음엔 어색했지만 오히려 골프장의 한적한 풍경이 깔끔하게 들어와 더 좋기도 했습니다.

중계방송을 오래 보다 보면 별별 내용도 알게 되고 골프에서 발생하는 애매한 상황도 해설자의 설명으로 정리되기도 합니다. 같이 중계를 보는 사람과 공감하기도, 비슷한 사례를 얘기하며 연대감을 갖기도 합니다. 

PGA 중계를 유독 좋아하는 아내는 뒷모습만으로도 선수의 이름을 알아맞힙니다. 선수의 스윙이나 걸음걸이를 보고 선수의 컨디션까지 가늠할 정도로 예리한 눈을 가졌습니다. 

3라운드까지 선두를 달리던 러셀 헨리의 스윙을 보더니, 아마추어 같다고 다른 선수에 비해 견고하지 못한 헐렁한 스윙이라고 말합니다. 뒤이어 해설자는 스윙 코치 없이 혼자서 연습한다고 일러줍니다. 최종 라운드에서 러셀 헨리는 티렐 해튼과 함께 공동 3위로 마감했습니다.

러셀 헨리 앞조에 있던 제이슨 코크랙과 젠더 셔플리는 타수를 줄이면서 우승 경쟁을 했습니다. 두 선수는 매치 플레이하듯이 긴장감 있는 경기를 했고 결국 우승컵은 제이슨 코크랙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우승은  8년의 시간과 233번째 도전의 결과물이었습니다.

▲2020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메이저대회 KB금융 스타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한 김효주 프로. 오텍캐리어 챔피언십 골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안나린 프로. 사진제공=KLPGA

얼마 전 끝난 오텍캐리어 챔피언십 대회에서 안나린 선수는 2위와 10차이로 마지막 라운드를 시작했고 별 이변 없이 우승했습니다. 지난 일요일에 끝난 KLPGA 투어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 KB금융 스타챔피언십에서도 비슷한 양상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김효주 선수는 10타 차이로 앞선 상황에서 시작했고 오버파를 기록했지만 이변은 없었습니다.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 스포츠에서 이런 경우는 좀 김이 빠질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스포츠 경기를 즐기는 이유 중 하나는 결과를 모르기 때문이고 예측할 수 없는 의외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나린 선수나 김효주 선수는 마치 특혜 받은 선수처럼 경기를 했습니다. 다른 조건에서 따로 기록한 스코어 카드를 제출한 것처럼 말입니다. 

실력의 격차가 있기에 순위가 결정됩니다. 하지만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선수끼리의 경쟁에서 그 차이는 미미할 것입니다. 그 날의 컨디션과 운도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안나린 선수나 김효주 선수가 각각 우승한 대회에서 3라운드까지 보여준 실력은 같이 경기하는 다른 선수들을 무색하게 했습니다. 

마침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것처럼 자신의 플레이를 했고 편하게 라운드를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만, 골프에서 가끔 나온다는 '그분이(?) 오신다'는 날이 아닐까요.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가끔 '그분이(?) 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에 최고의 스코어를 기록했다고 야비다리 치면서 자랑을 합니다. 골프를 치다 보면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구력이 오래된 사람일수록 경험치도 많은 것 같습니다. 

골프는 우연성과 운도 적당히 따라줘야 좋은 스코어를 기록할 수 있는데 그런 날이 그분이(?) 오시기 좋은 날입니다. 

OB선상으로 날아간 공도 나무를 맞거나 도로를 타고 치기 좋은 곳에 굴러가 있기도 합니다. 인도 속담에 나오는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준다'는 이럴 때 쓰는 표현 같습니다. 곁에서 보다 보면, 불던 바람도 멈추는 것 같고 탑핑으로 잘못한 어프로치 샷도 깃대를 맞고 홀 옆에 서있습니다. 산천초목이 도와주고 동반자들까지 실수하며 편하게 치도록 멍석을 깔아줍니다. 물론 본인의 샷이 잘되는 날이겠지만 세상의 모든 기운이 그를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2020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THE CJ CUP(이하 더CJ컵) 우승을 차지한 제이슨 코크랙. 사진제공=Getty Image for THE CJ CUP

골프를 치는 사람만 경험하는 영험한 순간입니다. 구력이나 실력이 얕을수록 짧게 왔다 가고 수준이 올라갈수록 더 길고 오래가는 것 같습니다. 8년의 긴 시간 끝에 우승한 제이슨 코크랙 선수나 안나린, 김효주 선수에게도 골프의 그분이(?) 왔는지 모릅니다.

김효주 선수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플레이에 만족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이 코스에서 라운드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써 내려간 기록을 음미하고 싶은 듯합니다.

골프를 즐기는 많은 분들이 올해를 마무리하기 전, 그분(?)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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