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올림픽 여자골프 우승으로 금메달을 차지한 넬리 코다, 은메달을 차지한 이나미 모네, 동메달을 따낸 리디아 고.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골프한국] 세계랭킹 2~4위의 고진영(26), 박인비(33), 김세영(28)과 6위 김효주(26)로 구성된 2020 도쿄올림픽 여자골프 한국 대표팀은 ‘어벤져스’라는 별명을 얻기에 충분했다.

슈퍼 히어로들로 구성된 어벤져스 팀이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듯 우리 골프 팬들은 올림픽 여자골프 대표선수들이 최근 활력을 잃은 LPGA투어의 한국선수들에게 새 기운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했다. 대표선수의 면면을 보면 이런 기대는 바람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의 어벤져스 팀은 빈 손으로 돌아섰다.
7일 일본 사이타마현 가와고에시 가스미가세키CC(파71·6,648야드)에서 열린 최종 4라운드에서 4명의 대표 선수들은 메달권에 들지 못했다.

2016 리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박인비는 2연패를 노렸고 나머지 선수들도 메달 경쟁에 나서 대회 전 메달 싹쓸이까지 욕심내기도 했지만 결과는 허탈했다.

어벤져스 팀이라면 출발부터 기세등등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라운드가 진행되면서 누군가 무섭게 치고 나오리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분발했지만 선두권은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고진영과 김세영이 최종 합계 10언더파 274타 공동 9위로 가장 높은 순위에 올랐다. 김효주는 9언더파 275타로 공동 15위, 2016년 리우 대회 금메달리스트 박인비는 5언더파 279타로 공동 23위에 머물렀다.

우승은 2라운드부터 단독 선두로 나선 세계랭킹 1위 넬리 코다(23·미국)가 17언더파 267타로 차지했다.

3라운드부터 압도적 기량으로 우승을 예약한 코다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한때 공동 선두를 허용했다. 18번 홀을 남겨두고 일본의 이나미 모네(22)와 17언더파 공동 선두가 됐다. 그러나 18번 홀에서 이나미가 드라이브 샷을 벙커에 빠뜨리는 바람에 보기를 범하고 파로 지킨 코다가 금메달의 주인공이 되었다.

▲박인비, 김효주, 김세영, 고진영 프로가 출전한 2020 도쿄올림픽 골프코스 대회장 모습이다. 사진제공=IGF

전날까지 선두권을 형성한 리디아 고(24·뉴질랜드교포)는 전반까지 버디 5개로 순항하다가 후반에 보기 3개가 나오면서 공동 2위에 만족해야 했다.

이나미 모네와 리디아 고는 은메달을 두고 18번 홀에서 연장 승부를 벌였다. 이번엔 리디아 고가 드라이브 샷을 벙커에 빠뜨려 3온 2퍼트로 보기를 하고 이나미 모네가 2온 2퍼트로 파를 지켜 은메달을 차지했다. 리디아 고는 동메달에 머물렀지만 리우 올림픽 은메달에 이어 올림픽 연속 메달 획득이라는 드문 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국가를 대표하는 60명이 출전한 올림픽 골프라 그런지 화제는 많았다. 
최고 42도까지 올라간 폭염과 까탈스런 그린에 선수들은 혀를 내둘렀다. 구름 갤러리는 없었지만 국가의 명예가 걸린 대회라 선수들의 긴장은 더했다.

압도적인 넬리 코다와 선두경쟁을 벌인 이나미 모네, 리디아 고, 아디티 아쇽(23·인도), 한나 그린(24·호주), E. 페데르센(덴마크) 등에 스포트라이트가 모아졌다.
특히 마지막 라운드에서 코다와 경쟁을 벌인 이나미 모네와 리디아 고의 경기는 매우 특별했다.

이나미 모네는 ‘일본의 박민지’다. 2018년 프로로 전향해 2019년부터 JLPGA투어에서 활동했다. 통산 7승인데 올해만 6승을 거두었다. 일본에서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이번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많았지만 이나미 모네와 리디아 고의 연장전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하이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리디아 고는 3온을 한 뒤 마크를 하고 이나미 모네의 버디 퍼팅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네의 퍼터를 떠난 공은 정확한 라인을 타고 10여m를 굴러 홀 직전에 멈췄다.

카메라는 모네의 공이 홀을 향해 굴러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리디아 고를 놓치지 않았다. 모네의 공이 홀을 향해 굴러가자 리디아 고의 눈도 함께 움직였다. 공이 홀 가까이 도달하자 리디아 고는 마치 자신의 홀인을 축하하듯 왼손 주먹을 쥐고 팔을 치켜들다 홀 앞에서 멈추자 아쉬움에 하든 동작을 멈추었다. 표정에 공이 들어가기를 바란 진정이 그대로 나타났다. 자신의 일처럼 아쉬움을 드러낸 그는 모네를 향해 ‘나이스 파’를 외친 뒤 다가가 축하의 포옹을 했다.

▲2020 도쿄올림픽 여자골프 은메달을 놓고 2-3위 결정전을 치른 이나미 모네와 리디아 고.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보통 대회에서 카메라에 잡히는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인 장면이었다. 동반자가 퍼트할 때 일부러 외면하고 먼 산을 보는 척하거나 아예 등을 돌리고 딴전을 피우는 게 다반사다. 먼저 퍼팅에 성공하곤 동반자가 퍼팅을 마치지 않았는데도 그린을 떠나 동반자를 황당케 하는 비매너도 적지 않다.
은메달을 놓고 다투는 경쟁자의 퍼팅을 진정으로 축하하는 세리머니를 자연스럽게 하는 리디아 고의 모습은 하이라이트 중에서도 압권이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진정한 골퍼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양팔 저울에 무게가 똑같은 물질을 올려놓으면 저울은 정확히 수평을 유지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가벼운 깃털을 하나를 얹어 놓으면 저울은 깃털 있는 쪽으로 기운다.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라도 균형은 깨진다.
골프에서도 깃털처럼 사소해 뵈는 동작이나 마음의 움직임이 경기에 영향을 미친다.
대회에 참가하는 누구나 우승이나 상위권 입상을 바란다. 전의를 다지고, 다짐하고 이를 꽉 문다. 의욕은 넘치고 기적까지 기대한다. 

국가를 대표해서 출전한 올림픽에서의 경기이니 그 압박감은 더 무거울 것이다.
우리 선수들은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한 이유로 메달을 향한 심한 압박감과 견디기 어려운 폭염, 적응하기 힘든 그린 등을 열거했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 선수들만 지는 짐이 아니다. 참가선수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고 있는 짐이다.
골프가 다짐과 결의, 전의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면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좋은 기량을 갖추었다고 해도 욕심, 의욕, 각오만으로 기량을 오롯이 발현시킬 수는 없다.

이때 어깨와 가슴을 짓누르는 짐을 내려놓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경쟁을 하되 상대를 배려하고 존경하고 자세, 스스로 뽐내지 않고 겸손할 줄 아는 태도, 무엇보다 골프라는 심오한 스포츠를 즐길 줄 아는 자세야말로 골퍼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골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리디아 고의 동작을 놓치지 않은 카메라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관련 기사: [표] 2020 도쿄올림픽 여자골프 최종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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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방민준의 골프세상' 바로가기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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