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박민지 프로. 사진제공=KLPGA


[골프한국] 홀마다 승부를 가려 이긴 홀의 수가 많은 쪽이 승리하는 매치 플레이(Match Play)는 전체 타수를 기준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스트로크 플레이(Stroke Play) 방식보다 더 인생을 닮았다.

스트로크 플레이에서도 이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톱 랭커들끼리의 경쟁으로 압축된다. 이미 각종 포인트와 통계자료로 우승 후보군의 윤곽이 드러나고 경기 결과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승횟수나 톱10 횟수가 많은 선수의 승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매치 플레이는 사정이 다르다.

매치 플레이에선 랭킹이 높은 선수와 랭킹이 낮은 선수를 한 조로 묶어 토너먼트전을 펼친다. 이 같은 조 편성은 흥행 보증수표인 톱 랭커들이 초반에 탈락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다. 랭킹이 높은 선수가 유리하도록 만든 경기방식이다.

톱 랭커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이 방식에서 오히려 이변이 속출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쥐구멍에 해 뜰 날이 생기는가 하면 개천에서 용 나듯 벼락스타가 나타나는 등 인생 역전극이 펼쳐진다. “골프는 인생 자체보다 더 인생을 닮았다”는 데이비드 누난의 시각에서 보면 매치플레이야말로 인생을 닮은 것 같다. 

매치 플레이에 임하는 선수들을 보면 몇 가지 스타일로 분류할 수 있다.
상대가 누구든 자신의 경기에 집중하는 구도자형, 승리를 목표로 올인하는 전사형, 승부를 떠나 대결 자체를 즐기는 자족(自足)형. 승리를 위해 심리전, 신경전 등을 펼치며 상황에 따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도박사(賭博師)형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자세로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는 하룻강아지형도 보인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과 다를 바 없다.

2013년 2월 미국 애리조나주 마라나의 리츠칼튼GC에서 열린 PGA투어 유일의 매치 플레이 대회인 액센츄어 매치 플레이 챔피언십은 이변의 전형이었다. 

객관적 기량이나 승률 등을 따지면 톱 랭커들끼리 우승을 다투는 게 당연하지만 이 대회에선 톱 랭커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주목받지 못하던 선수가 우승컵을 차지하는 이변이 속출했다. 

1, 2번 시드를 받은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와 타이거 우즈(미국)가 64강전에서 64번 시드의 무명 셰인 로리(아일랜드)와 8번 시드의 찰스 하웰 3세(미국)에게 덜미가 잡혀 짐을 쌌다. 랭킹 3~6위인 루크 도널드(잉글랜드), 루이 우스투이젠(남아공), 저스틴 로즈(잉글랜드)도 32강전에서 하위 랭커들에게 패배의 쓴맛을 봤다.
세계 랭킹 10위 버바 왓슨(미국·10위)만이 유일하게 16강에 진출했으나 그도 16강전에서 41번 시드인 제이슨 데이(호주)에게 무릎을 꿇어 톱10 가운데 단 한 명도 8강에 오르지 못했다. 
우승한 맷 쿠차는 21번, 준우승한 헌터 메이핸은 23번, 3위의 제이슨 데이(호주)는 41번 시드로 모두 중간 랭커들이고 4위의 이언 풀터(영국)가 가장 높은 11번 시드였다.

이런 매치 플레이의 혼전과 이변 속에 골프의 묘미가 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듯 매치플레이는 하위 랭커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운만 좋으면 개천에서 용 나듯 무명선수에서 일약 스타로 부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위 랭커들에게는 아무리 약한 상대라 해도 얕잡아 보다간 언제라도 추락의 치욕을 맛볼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무엇보다 골프의 재미를 더해준다. 세계 랭킹 순서 그대로 각종 대회에서 순위가 정해진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스포츠팬이란 양면성이 있어서 황제의 군림에 환호하면서도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판을 뒤집는 새로운 스타의 출현을 고대한다. 현상유지와 판 뒤집기의 대결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매치 플레이에 압축된 골프의 미학이 있는 것이다.

▲2021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박민지 프로가 결승전에서 박주영과 경기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KLPGA


지난 19~23일 춘천 라데나GC에서 열린 KLPGA 유일의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도 매치 플레이의 특성이 그대로 나타났다. 
특히 파죽의 7연승으로 우승한 박민지(23)의 경우 매치 플레이 이변의 주인공이 되었다.

4월 25일 넥센-세인트나인 마스터즈에 이어 지난 16일 NH투자증권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그가 1주일 만에 매치 플레이에서 우승하리라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가 유력한 우승 후보인 것만은 사실이나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연속 우승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입에서 “내가 미친 것 같다”는 말이 나올 만했다. 6개 대회에서 3승을 그것도 한 달 만에 올린 것도, 매치 플레이에서 7연승으로 ‘매치 퀸’이 된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시즌 첫 우승을 하고 바로 다음 대회인 크리스 F&C 제43회 KLPGA 챔피언십에서 컷 탈락한 뒤 스스로 우승의 기쁨을 지우는 지혜를 터득한 것도 이번 매치 플레이 우승의 원동력이 된 것 같다. 그에겐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전사형 골퍼의 모습이 역력했다.
톱시드의 유해란(20)이나 저돌적 전사인 장하나(29)가 8강의 벽을 넘지 못한 것, 박주영(30)의 결승 진출도 이변이다. 

▲2021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 1, 2번 시드를 받고 출전한 유해란, 장하나 프로. 사진제공=KLPGA


매치 플레이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미묘한 신경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선수들끼리 너무 잘 알고 사이도 좋아 상대의 신경을 거스르는 행동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매치 플레이의 매너에 관한 한 수준급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PGA투어나 LPGA투어의 매치 플레이에서 상대의 리듬을 깨거나 집중을 방해하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자주 잡힌다.

20세기 초 미국의 골프영웅 월터 헤이건(1892~1969·미국)은 전설적인 매치 플레이어로도 유명하다. 중앙일보의 성호준 기자가 ‘상대를 최대한 칭찬하라, 그러면 그는 무너진다- 치열한 심리전의 묘미 매치 플레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그를 소개한 적이 있다.
월터 헤이건은 매치 플레이로 치러진 PGA챔피언십에서 1924년부터 27년까지 4년 연속 우승했다. 그가 얼마나 매치 플레이에 강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1926년 2월28일과 3월7일 36홀씩 총 72홀로 치른 구성(球聖) 바비 존스(Robert Tyre Jones Jr.: 1902~1971)와의 이벤트 경기에서 올린 전과는 헤이건 매치 플레이의 하이라이트였다.
하버드대를 나온 지성파 골퍼로 아마추어를 고집한 바비 존스는 당시 ‘골프황제’로, 대중적 인기를 등에 업고 파티를 즐긴 월터 헤이건은 ‘골프의 왕’으로 불리었다.

그때까지 두 선수가 함께 경기한 6번의 US오픈에서 존스가 5승 1패로 앞섰기에 존스가 헤이건을 이길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존스는 ‘올드맨 파(Old man Par)’와 경기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각 홀의 파를 의인화한 개념으로, 상대가 아니라 코스와 자신과 경기를 한다는 구도자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

이 매치 플레이에서 바비 존스는 투온 투 퍼트의 깔끔한 플레이를 펴면서도 미스샷을 자주 내는 월터 헤이건에게 끌려갔다. 형편없는 플레이를 하면서도 버디를 많이 건진 헤이건에게 끌려가다 ‘올드맨 파 철학’을 깜빡한 그는 36홀 매치에서 8홀 차로, 72홀 합계에서 12홀 차로 대패했다. 

경기 후 존스는 “드라이브 샷을 똑바로 치고 두 번째 샷을 그린에 올려 2퍼트로 파를 하는 사람과 경기하는 게 훨씬 편하다. 나보다 더 가깝게 붙여 버디를 한다면 인정하겠다. 그런데 상대가 드라이브 샷을 실수하고 두 번째 샷도 형편없었는데 버디로 홀아웃한다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헤이건의 플레이에 불만을 털어놨다.

존스는 월터 헤이건에 패한 원인으로 ‘올드맨 파’와 경기하지 않고 월터 헤이건을 상대로 경기를 벌인 것임을 깨닫고는 자세를 가다듬어 1930년 한해 미국과 영국의 4개 메이저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사상 첫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고 이후 매치 플레이에서도 9번 연속 이길 수 있었다.

스타일로 보면 바비 존스가 구도자형이라면 월터 헤이건은 전형적인 도박사형이다.
쇼맨십이 강한 헤이건은 심리전에도 능했다. 당대의 희곡작가이자 배우인 패터슨 맥넛은 헤이건을 두고 “골퍼가 안 됐다면 훌륭한 배우가 되었을 것”이라며 그가 갤러리뿐만 아니라 상대를 제압하게 위해 온갖 쇼맨십을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헤이건은 비정한 전략가이기도 했다. 상대의 성격을 철저히 파악하고 룰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포함해 통산 48승을 올린 진 사라젠(1902~1999)은 “헤이건의 전략 중 하나는 친절로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젊은 선수가 기세가 오르면 샷을 칭찬하면서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나와 함께 투어를 다니자는 등 친절을 베풀며 마음을 열게 해놓고 자신은 냉혹한 플레이를 한다.”고 털어놨다. 

1934년 PGA챔피언십 4강전 때 상대인 레드 니어는 출발이 좋았다. 헤이건은 상대의 샷을 칭찬하면서 “이곳이 우리 동네인데 내가 대패하면 지역신문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엄살을 부렸다. 디어는 첫 홀에서 버디를 했지만 헤이건에게 휘말려 결국 8홀 차로 졌다. 

1925년 PGA챔피언십 8강전에서 레오 디젤과 연장전에 들어갔다. 연장 첫 홀에서 1.2m 버디펏을 성공한 헤이건은 1m가 조금 넘는 상대에게 컨시드를 줬다. 헤이건은 이날 이만한 거리에서 한 번도 컨시드를 준 적이 없었기에 레오 디젤은 당황했다. 그는 퍼팅 준비에 온 신경을 쓰고 있다가 갑자기 다음 홀로 이동해 드라이브샷을 하는 바람에 토핑을 내고는 결국 헤이건에게 지고 말았다. 컨시드로 상대의 리듬을 깨어 골탕 먹이는 수법의 선구자인 셈이다.
 
이듬해 PGA챔피언십 결승전에서도 5홀 차로 앞서다 5홀 차로 헤이건에게 패한 디젤은 경기 후 동료에게 “헤이건은 나를 죽이는 것 같다. 다시 그와는 경기하고 싶지 않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경기에서는 잔인했지만 인생은 즐겼다. “서두르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꽃향기를 맡을 수 있는 짧은 시간 이곳에 있는 것일 뿐”이라며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백만장자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는 챔피언 트로피가 필요하다”는 말도 남겼다.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방민준의 골프세상' 바로가기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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