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대회 제84회 마스터스 토너먼트에 출전한 브라이슨 디섐보.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골프한국] 골프는 물결을 닮았다.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이다가 집채만 한 파도로 돌변하는가 하면 제풀에 힘을 잃고 잔잔해진다. 그 잔잔함도 잠시,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면서 거센 파도가 다시 몰아친다.

‘필드의 물리학자’ ‘움직이는 실험실’ ‘골프 머신’ 브라이슨 디섐보(27)는 올해 거대한 파도처럼 미국프로골프(PGA)투어를 덮쳤다.

7월 로켓 모기지 클래식 우승에 이어 9월 메이저 US오픈까지 제패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PGA투어가 장기간 휴지기에 들어간 사이 그는 헐크로 변신해 돌아와 PGA투어를 뒤흔들어놓았다. 

물리학도답게 필드에서도 끊임없는 실험정신을 과시해온 그가 올해 새로이 장착한 무기는 거포(巨砲)다. 이 신병기를 위해 단백질 섭취로 몸도 헐크처럼 불리고 근육도 키웠다.

PGA투어 평균 드라이버 비거리는 298.2야드다. 장타자라고 해야 310야드 전후다. 디섐보는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를 344.5야드로 늘렸다. 단연 1위다. 최근엔 400야드도 넘겼다. 
전통적인 골프 문법을 파괴한 디섐보의 거포는 PGA투어에 ‘장타 경쟁’을 촉발시켰다.

이런 디섐보 때문에 사상 처음 11월에 열린 제84회 마스터스 토너먼트는 코로나 영향에도 불구하고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그는 오거스타 내셔널GC에 골프 백을 내린 뒤 코스 공략계획을 밝혔다. 말로는 ‘경기계획(game plan)’이라고 했지만 내용은 코스를 유린하겠다는 ‘초토화 계획’이었다.

웬만한 파4 홀은 웨지로 2온을 노리고, 파5 홀은 모두 2온을 하는데 두 번째 샷은 미들 아이언을 쓰겠다고 했다. 장애물은 우회하지 않고 그대로 넘기겠다는 전략도 밝혔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오거스타 내셔널GC의 파가 72에서 66으로 줄어든다. 실전에서 그의 계획이 통한다면 자신 기준 이븐파만 쳐도 6언더파를 치는 셈이 된다. 다른 선수들 입장에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황당해 뵈는 그의 ‘코스 축지법’은 연습라운드에서 동반자들을 놀라게 했다. 몇 개 홀 실수가 있었지만 그의 초토화 전략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과연 디섐보가 오거스타 내셔널GC를 초토화해 한 시즌 메이저 대회 2회 연속우승이란 금자탑을 세울 것인가, 타이거 우즈나 더스틴 존슨, 브룩스 켑카, 저스틴 토마스, 존 람 등 정상급 선수들이 디섐보의 초토화 작전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특히 디펜딩 챔피언인 타이거 우즈가 디섐보의 독주를 저지하고 샘 스니드와 공유한 PGA투어 통산 82승의 기록을 깨고 메이저 18승이라는 잭 니클라우스의 기록에 한 발짝 다가갈 것인가는 뜨거운 관전 포인트다.

그러나 실전에서 ‘초토화 작전’의 희생자는 브라이슨 디섐보 자신이 되고 말았다.

1라운드에서 2언더파에 그쳤다. 그의 기준(파66)대로라면 4오버파다. 버디 5개를 건졌지만 쉽게 요리하겠다던 파5 홀에서 더블보기를 하고 파4 홀에서도 보기를 했다. 14차례 티샷 중 페어웨이를 지킨 것은 8개에 지나지 않았다.

일몰로 중단되었다가 다음 날 속개된 2라운드에서는 버디를 7개나 건졌지만 보기 6개에 트리플보기 1개로 2 오버파를 쳐 두 라운드 합계 이븐파로 간신히 컷(이븐파)을 통과했다. 3, 4라운드의 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그의 마스터스 초토화 계획은 이미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디섐보의 실험정신과 도전욕은 외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골프의 지평을 넓히고 연못에 풀어놓은 메기처럼 선수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어 궁극적으로 골프를 진화시키는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디섐보가 골프에 접근하는 자세는 골프와 어울려 보이지 않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마스터스에서 경기하는 그는 확률을 좇는 도박사 또는 씩씩거리며 돌진하는 멧돼지를 연상시킨다.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 드라이버를 휘두르는 모습은 모든 걸 부셔버리겠다는 자세다. 힘이 잔뜩 들어간 팔다리는 경직돼 있고 얼굴은 전의가 불타오른다. 코스와 조화하고 순응해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전인미답의 밀림을 헤쳐가듯 정글도를 휘두르는 특공대원의 모습이다.

아브라함 앤서, 카메론 스미스, 저스틴 토마스, 더스틴 존슨, 패트릭 캔틀레이, 임성재, 마쓰야마 히데키, 존 람, 토미 플리트우드 등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는 선수들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이들에게선 공통적으로 도전은 하되 겸허함을 잃지 않고 코스의 모든 것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구도자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베른하르트 랑거(63)나 래리 마이즈(62) 등 고령 선수들이 길지도 않은 샷으로 난코스에 적응해가는 모습이 거포를 날리는 그보다 더 골프 정신에 어울려 보인다. 

거리만 늘리면 골프를 정복할 수 있다는 디섐보의 시각이 과연 얼마나 통할까. 

‘골프는 물결을 닮았다’는 시각에서 보면 그의 모습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비말(飛沫) 같다. 

잭 니클라우스, 아놀드 파머, 타이거 우즈 등 영원히 지배할 것 같은 영웅이 나타나지만 결국은 점멸할 뿐이다. 이들 골프 영웅들은 골프를 정복하겠다고 나섰지만 골프란 결코 정복되는 게 아님을 깨닫고 비로소 순례자의 겸허함을 체득하고 골프코스를 물러난다.

티베트 고원의 카일라스산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성산(聖山)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수정을 의미하는 이 산은 해발 6,656m로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의 성지다. 실제로 거대한 수정처럼 보인다. 한 티베트 고승이 정상에 올랐다는 전설은 있지만 미답(未踏)의 봉우리로 알려져 있다. 카일라스산 주위 52km를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순례하는 모습은 장엄하고 신비롭다.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 내셔널GC는 ‘골프의 카일라스산’이다. 그린 자켓을 입을 수는 있지만 코스를 정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오거스타 내셔널GC의 코스는 늘 그 자리에 있고 순례자만 바뀔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브라이슨 디섐보도 마스터스 전설의 한 부분으로 녹아들 것이다. 늙은 말을 타고 풍차를 공격한 돈 키호테로 기억되든가 카일라스의 순례자처럼 마스터스의 숭배자로 오체투지 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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