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찾아온 여름 날씨, 이어지는 무더위가 온몸의 기력을 빼앗아 가는 듯 했다. 출근길 자동차온도계를 보니 이른 시간임에도 30도씨를 육박했다. 오늘도 무척 덥겠구나 하는 예감을 하며, 창문을 활짝 열고 가속페달을 밟았다.

라비에벨CC 박세원 필드가이드
골프장에 도착해 팀 배치 후 백을 싣는데 땀이 난다. 조금 낡은 백을 열어보니 금빛으로 빛나는 아이언과 기본으로 4개씩 들어있는 우드가 있었다. 어르신들인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광장으로 내려오시는 고객님들을 보니 백발에 멋진 페도라를 쓴 신사분들이었다.

특히 뒤에 내려오시는 두 분은 곧 쓰러지실 것 같은 어르신이다. “날씨가 참 덥다”며 벌써부터 땀을 흘리시는 고객님들을 보니 걱정이 앞선다. 체조도 생략하자고 하시고, 기운 없이 출발하신 고객님들은 한 샷 한 샷이 힘겨워 보이신다. 샷거리는 많이 나지 않았지만, 똑바로 전진하고 계셨다. 웬만하면 카트로 모셔가고, 부채를 꺼내 부쳐드려도 힘없이 다니시는 모습을 보니, 예전에 연세가 많았던 어떤 회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여름 라운드를 나갈 때면 항상 먼저 카트로 찾아오셔서 직접 아이스박스에 얼음과 물을 채우시고, 얼음물과 시원하게 얼린 안면타월을 챙기시던 회원님. 매번 그리 유난을 떠시며 이 더운 날에 왜 라운드를 하시는 건지 궁금했던 나는 직접 모시게 되던 날 여쭤봤다. 회원님은 ‘허허’ 웃으시며 씁쓸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내셨다.

절친한 친구가 고혈압증세가 약간 있으셨는데, 함께 라운드를 한 날이 그렇게 더웠었단다. 폭염주의보까지 내리고, 조금 힘겨운 라운드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지더니 그대로 곁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여름라운드를 안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되면 이렇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고, 조금 유난스러워도 이해해 달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들으니 유난스럽다고 느꼈던 회원님의 행동이 이해가 됐고, 그 이후로도 그 회원님을 모시게 될 때면 조금 더 신경을 쓰곤 했다.

오늘 모시게 된 고객님들도 한 홀 한 홀 지날수록 콩나물시루의 콩나물처럼 시들시들해지시고 있었다. 그때 울리는 핸드폰의 경보에 깜짝 놀라 보니, 긴급 재난 문자가 들어왔다. 폭염주의보가 내렸다며, ‘노인보호’에 신경 쓰라는 문자다. 안 되겠다 싶어 아이스박스를 열어 안면타월을 적혀서 꼭 짠다. 시원해진 수건을 고객님 뒷목에 대드리니 잠깐 놀라셨지만, 곧 안색이 환해지셨다. 고맙다며, 낡은 지갑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 꼭 쥐어주신다. 받기가 민망스러워 정중히 거절하니, 예전 회원님이 해주셨던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신다. “우리 나이 대에는 사실 이런 날씨엔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 오래된 친구들과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나왔다”며 “이렇게 4명이 모이는 건 언제가 마지막일지 모르는데 신경써줘서 고마워 주는 거니 넣어두라”신다.

그렇게 얼음타월과 함께 무사히 라운드를 마친 고객님들께서는 “고맙다”며 “혹시 다음에도 이렇게 4명이 모이면 꼭 찾아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가셨다. 부디 네 분을 다시 뵐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배웅해 드리는데, 마음이 왠지 허허로워진다. 뜨거운 날씨만큼 뜨거운 우정이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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