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잘 맞은 공이 OB선상을 지나 아득히 사라질 때.

220야드 워터 해저드를 넘어간 공이 뒤로 미끄러져서 물에 빠질 때. 드라이브 샷을
페어웨이 중간으로 250야드 날린후 세컨샷이 뒷땅 때릴 때. 벙커샷이 홈런볼이 되어
날아갈 때.

벙커에서 세 번째 샷을 하고 있을 때.

내리막 퍼팅이 컵을 지나 글린 밖으로 흘러 내릴 때. 내기 돈이 모두 걸려있는
홀에서 1.5미터 퍼팅이 컵 주위를 돌고 돌아 나올 때…

골프를 하다 보면 안타깝고 아찔한 순간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럴 때 골퍼들의 표정을 보면 다양하다. 이를 꽉 다문 사람, 한탄을 하는 사람, 골프채로 땅을 내리치는 사람, 머리를 쥐어짜는 사람, 자기 자신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는 사람…

지난 주 지인들과 라운드 하다가 또 다른 교훈을 얻었다.

나는 첫 홀부터 버디를 잡았다.
‘초식불길’이면 ‘초식 대길’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왔지만 첫 홀 버디를 잡고 기분 나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두 번째부터 파행진을 시작해서 파 네게 보기 한 개 다시 파 3개로 전반을 끝냈다.
물론 스킨스 내기 돈은 대부분 내 주머니로 들어왔다.

그런데 인코스 첫번째 홀에서 드라마가 연출되었다. 잘 맞은 공이 슬라이스가 나더니
아슬아슬하게 OB라인을 넘고 말았다. OB티에서 친 공은 그린 벙커에 떨어졌는데 가보니

벙커턱과 모래 사이에 깊숙히 박혀서 공 머리만 보였다. 힘껏 벙커샷한 공은 아예 땅속
으로 들어가버렸다.

다시 쳤더니 벙커턱을 맞고 뒤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정신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점수가 다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트리플 보기 이상을 하면
지금까지 딴 돈도 다 물어내야 하니 그야말로 일장춘몽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동반자들의 얼굴을 보니 모두 보름달같이 환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돈은 물어내는 것이고 망신이나 피해보자는 심정으로 심호흡을 하고 다시 벙커샷
을 했다. 공을 끝까지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힘껏 벙커샷을 했는데 공은 샌드웻지의 날에
맞고 홈런볼이 되고 말았다.

이쯤 되니까 어금니 근처에서 이상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설상가상으로 날아간 공은 그린을 넘어 또 다시 OB가 되고 말았다.
이 홀에서만 오늘 내 핸디캡타수를 다 까먹고 말았다.

다음 홀부터는 공이 제대로 맞을 리 없었다. 채를 힘껏 휘둘러도 공이 대드는 것 같았다.
이쯤 되니까 동반자들도 조우크를 삼가하고 모두 깊은 침묵에 빠지고 말았다.

그늘집에 도착하니 모두 이구동성으로 막걸리를 달라고 외친다. 이번 홀쯤 와서는 기분
좋게 버디주를 마셔야 되는데 위로주를 마시고 있자니 처량한 기분을 넘어 참담한 기분
이었다.

‘뜻대로 안되는게 골프와 자식농사다.’

‘골프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골프는 파라독스의 게임이다.’

이처럼 온갖 골프명언들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런데 화장실에 갔다가 작은 액자에 써있는
이런 글을 보았다.

‘필드에서는 어떠한 불운도 감수하라. 불운을 감수하면 반드시 좋은 때가 올 수
있다는 교훈을 가르쳐주는 것이 골프다.’


이 글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 골프장에서 나보다 더 불운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불운을 감수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니 이는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온갖 힘든 일도 지나고 보니 오히려 약이 되지 않았던가!

‘오늘 이처럼 샷도 망가지고 점수도 망가지는 것은 다른 날 좋은 기록으로 더
행복감을 느끼기 위한 저축일 뿐이다.’

‘오늘 전반을 잘 치다가 후반에 무너졌지만 언젠가는 전반에 무너졌다가 후반에 잘 쳐서 대파상을 받는 날도 오겠지…’


이날 이후 나는 머리 속에 ‘불운감수’라는 사자성어를 새겨 넣고 산다.

갑자기 다가온 불운과 싸우지 마라! 더 망가질 뿐이다. 골프에서나 인생에서나 불운을
감수하면 최소한 더 이상 망가지지는 않느니라.

‘불운은 감수하고 행운은 감사하라.’


글: 윤 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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