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라운드 첫 홀인 1번홀에서 쿼드러플 보기를 기록한 2022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윈덤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주형 프로. 사진제공=PGA투어
1라운드 첫 홀인 1번홀에서 쿼드러플 보기를 기록한 2022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윈덤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주형 프로. 사진제공=PGA투어

 

 

[골프한국] 골프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 때가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겪고 난 후다. 

연속 OB나 트리플 또는 더블 파, 혹은 4번의 퍼트 등 최악의 순간은 마치 악마의 손길처럼 골퍼의 정신과 육체를 휘감는다. 이 악마의 손길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다음 홀, 남은 나머지 홀을 모두 돌아야 한다는 것처럼 가혹한 지옥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과 맞닥뜨려본 사람들은 당장 골프채를 내던지고 호수에 몸을 던지고 싶거나 골프장을 떠나고 싶은 충동에 빠졌던 것을 생생히 떠올릴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겪고 난 뒤에 벌어진 참담한 상황이 골퍼를 더욱 화나게 만들고 절망에 빠뜨린다. 

최악의 상황을 겪고 난 후 이를 만회하기 위한 무리한 동작은 필경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골퍼를 제어할 수 없는 난조의 늪으로 유인한다. 마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과 같다. 한 샷 한 샷이 악몽의 연속이다. 끊어지지 않는 악순환이 골퍼를 미치게 만든다.

 

그날의 골프를 망치지 않으려면 이 악몽에서 빨리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빨리 잊고 끊어야 한다. 마치 도마뱀이 위험한 순간 꼬리를 잘라버리고 생명을 구하듯. 문제는 몸서리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고 잊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발버둥 칠수록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역발상이다.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식으로 최악의 한순간 한순간을 즐기겠다는 생각을 하면 타오르든 불길이 잦아든다. 

 

학창시절 무전여행을 떠나거나 막노동을 할 때 배고픔이나 힘든 상황과 부딪혀도 심한 절망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의 굶주림이나 땀, 모멸감 등은 극복의 쾌감을 제공해주는 귀중한 것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즉 고통의 불행을 맛보기 위해 고생을 자초한 것이기에 자신을 고통이나 불행의 나락으로 끌어들이지 못한다. 부족한 것투성이의 배낭여행이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것은 부족함 속에서 부딪히는 매 순간의 긴장감과 온갖 노력 끝에 위기를 극복했을 때의 쾌감,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흥분, 때로는 나락에 떨어져 뒹구는 자신에 대한 방관자적 관조가 있기 때문이다. 

가혹한 군 특수훈련을 이겨낸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내 몸이 얼마나 견디나 실험해보자’ ‘내가 이기나 조교가 이기나 붙어 보자’는 등의 자기최면을 걸어 고통을 새로운 형태의 쾌감으로 전환시키는 비법을 사용했음을 알게 된다. 

 

2022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US오픈 마지막 날 최종라운드 18번홀에서 티샷 실수를 했지만, 바로 멋진 벙커샷으로 만회하고 우승을 차지한 맷 피츠패트릭.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2022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US오픈 마지막 날 최종라운드 18번홀에서 티샷 실수를 했지만, 바로 멋진 벙커샷으로 만회하고 우승을 차지한 맷 피츠패트릭.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골프도 마찬가지다. 최악의 상황을 맛본다고 생각해보자. 골프의 무전여행, 또는 특수훈련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될지언정 악몽으로 골프를 망치게 하는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즐기려면 투혼이 있어야 한다. 게임에 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는 것이 뻔하게 예견되더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불퇴전의 투혼이 골프를 열정적으로 만들고 최후의 패배에도 어깨를 펴고 당당할 수 있게 해준다. 
쉽게 게임을 포기하면 지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다.

 

바람이 불어도 하늘에 걸린 달을 움직이지 못하고(風吹不動天邊月) 
눈이 쌓여도 계곡의 소나무를 꺾기 어렵다.(雪壓難催磵底松)

이 선시(禪詩)는 어떠한 난관과 고통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참고 견디는 경지를 보여준다. 뜬구름은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오가지만 하늘의 달은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잡목의 가지는 쌓인 눈이 내리누르면 쉽게 부러지지만 골짜기의 장송은 웬만한 눈에도 꺾이지 않는다는 것은 각고면려의 의연한 자세를 생생히 드러낸다.

골프를 하면서 부딪히는 어려움과 악몽들도 결국은 자신을 갈고 다듬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바람 부는 하늘의 달처럼, 무거운 눈을 이고도 버티고 선 장송처럼 의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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