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월드골프챔피언십(WGC) 페덱스 세인트 주드 인비테이셔널 골프대회에 출전한 김시우 프로.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골프한국]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틴컵(TIN CUP)’은 드물게 골프를 주제로 한 영화다. 텍사스주 시골의 레슨프로인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US오픈에 출전, 목전에 둔 우승을 놓치면서도 자신만의 플레이를 펼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게임을 망치면서도 자신이 즐기는 스타일의 골프를 고집하는 괴짜 골퍼로 등장한다.

US오픈 마지막 라운드 18홀에서 보여주는 그의 플레이는 골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어떤 태도가 진정 골프를 즐기는 것인가 화두를 던져준다.

레슨을 받으러 왔다가 가까워진 여성 심리치료사의 부추김으로 지역 선발전을 거쳐 US오픈에 참가한 주인공은 대선수들 틈에서 주눅이 들어 첫날은 83타라는 참담한 스코어를 낸다. 시골구석의 레슨프로지만 대학 시절 촉망되는 골프선수로 명성을 날렸던 그로서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두 번째 라운드부터 분발한 그는 62타라는 데일리 베스트를 기록하며 선두대열에 합류한다.

마지막 4라운드 마지막 홀을 남기고 주인공은 다른 한 선수와 공동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18홀에서 그의 드라이브샷은 잘 날아가 그린까지 237야드를 남겨두고 있었다. 우드로 2온이 가능한 거리였으나 그린 앞 연못이 입을 벌리고 있어 대부분의 선수들은 3온의 안전한 길을 택했다. 주인공은 지난 3라운드 내내 이곳에서 2온을 시도했다가 모두 공을 물에 빠뜨렸다. 동반자는 안전하게 아이언으로 호수에 못 미치게 볼을 보냈다.

그의 캐디는 안전하게 3온을 권하며 7번 아이언을 뽑았다. 그러나 주인공은 3번 우드를 선택했다. 중계방송하는 아나운서와 해설위원은 그의 무모한 시도를 비웃는 듯했다.

주인공이 3번 우드로 날린 볼은 멋지게 날아 그린에 떨어졌다. 그러나 오르막 그린에 떨어진 볼은 백스핀이 심하게 걸려 뒤로 구르더니 연못에 빠졌다.

아직 파의 기회는 남아 있었다. 상대 선수가 버디를 하지 못하면 플레이오프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 자리에서 다시 볼을 드롭해 4타째를 쳤다. 볼은 다시 연못에 빠졌다. 6타째 친 볼도 연못에 빠졌다.

아나운서와 해설위원은 무모한 모험을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의 행동에 조롱과 경멸 섞인 코멘트를 했으나 갤러리들로부터는 환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여자 친구는 한술 더 떠 “당신 스타일대로 하라!”고 용기를 준다. 이 말에 그는 3번 우드를 휘둘러 모두 5개의 볼을 연못에 수장시켰다. 그러고도 그 자리에서 여섯 번째로 볼을 날렸다. 12타째였다.

갤러리들의 시선에 쫓기듯 허공을 뚫고 날아간 볼은 그린 위 핀 바로 앞에 떨어져 2m 정도를 구르더니 홀로 사라졌다. 갤러리들은 환호성을 멈출 줄 몰랐고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장면을 설명하느라 법석을 떨었다.

홀에서 볼을 꺼낸 주인공은 다섯 개의 볼을 삼킨 연못으로 던져버리곤 갤러리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며 그린을 벗어났다.
여자친구가 주인공에게 다가가 안기며 말한다.
“잘 해냈어요. US오픈 우승자는 5년만 지나면 다 잊혀지지만 당신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가장 행복한 골퍼와 그 골퍼에게 안긴 여자 친구에게 갤러리들의 박수와 환호가 뜨겁게 쏟아졌다.

▲1999년 스코틀랜드의 커누스티 골프코스에서 열린 디 오픈 챔피언십 최종라운드에서 경기하는 장 반 드 벨드의 모습이다.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이 영화와 비슷한 상황이 1999년 스코틀랜드의 커누스티 골프코스에서 열린 디 오픈 마지막 라운드 마지막 홀에서 벌어졌다. 18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선 프랑스의 장 반 드 벨드(55)는 2위와는 3타차로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좁은 페어웨이 때문에 굳이 드라이버를 잡을 필요가 없는데도 그는 드라이버로 티샷을 했다. 볼은 러프로 날아갔다. 그러나 우승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개울을 건너 핀까지의 거리는 235야드. 개울을 피해 아이언을 잡으면 안전하게 3온이 가능했다. 3온에 실패하더라도 더블보기로 막으면 우승은 그의 차지였다.

그러나 그는 2온을 시도했다. 그의 두 번째로 친 볼은 개울을 건넜지만 그린 옆 관람대를 맞고 튀어 깊은 러프로 들어갔다. 러프에서 친 볼은 물로 들어가고, 1벌타 후 날린 볼은 벙커로 들어갔다. 결과는 트리플 보기. 그는 결국 연장전에서 스코틀랜드의 무명선수 폴 로리에게 우승을 헌납했다. 

언론들은 일약 스타가 될 기회를 놓쳤다며 그의 만용에 가까운 무모함을 꾸짖었다. 대회가 끝난 후 그는 “18번 홀에서의 소극적 플레이는 골프 정신에 맞지 않고 프랑스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언론들은 ‘그가 소극적 플레이로 우승했다 한들 누가 골프 정신 운운할 것인가’라며 명분과 만용을 구분 못 하는 그를 비웃었다.

▲2021년 월드골프챔피언십(WGC) 페덱스 세인트 주드 인비테이셔널 골프대회에 출전한 김시우 프로. 사진제공=Getty Image for THE CJ CUP

김시우(26)가 9일(한국시간)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근교 TPC 사우스윈드(파70)에서 열린 특급대회 월드골프챔피언십(WGC) 페덱스 세인트 주드 인비테이셔널 마지막 라운드에서 한 홀에서만 무려 10오버파를 치는 초대형사고를 쳤다.

155야드의 비교적 짧은 파3 홀인 11번 홀에서 김시우는 13타로 홀아웃했다. 기준타수보다 무려 10타를 더 쳐 이름도 생소한 데큐플(decuple) 보기를 기록했다.

그린을 에워싼 워터해저드의 마법에 걸린 것이다. 핀은 그린 오른쪽에 꽂혀 있어 중앙을 보고 티샷을 하면 온이 무난했으나 그는 핀을 바로 노렸다.
연속해서 공을 물에 빠뜨리고도 핀을 노리는 바람에 다섯 개 공을 수장시켰다. 여섯 번째 공을 11타 만에 온 시킨 김시우는 결국 10오버파 13타로 홀아웃했다.

우승컵은 멕시코의 애브라함 앤서(30)의 품으로 돌아갔다. 일본의 마쓰야마 히데키(29), 미국의 샘 번스(25)와 함께 연장전에 돌입, 2차 연장에서 버디를 잡아 우승했다. 2013년 프로로 전향해 PGA투어 121번째 경기 만에 거둔 첫 승이다. 

김시우의 스코어는 최종합계 293타 13오버파. 66명이 참가해 1명이 기권한 가운데 꼴찌는 그의 몫이었다. 임성재(23)가 합계 이븐파 280타를 쳐 도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잰더 쇼플리와 함께 공동 46위, 이경훈(30)이 공동 54위(2오버파 282타)로 대회를 마쳤다.

김시우의 파3홀 13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영화 ‘틴컵’의 주인공이나 장 방 드 벨드처럼 선수 개인의 소신과 철학으로 볼 수도 있고 케빈 나처럼 분노의 불길에 휩싸여 냉정을 잃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근거 없는 만용이거나 자포자기로 볼 수도 있다.

1980년 마스터스에서 톰 와이스코프(79)가 12번 홀(파4)에서 공을 5차례나 물에 빠뜨리며 데큐플 보기를 한 적이 있다.
케빈 나는 2010년 4월 발레로 텍사스오픈 첫 라운드 9번 홀(파4)에서 무려 12오버파를 쳐 분노의 화신임을 증명했다.

연장전에 나선 세 선수는 물론 단독 선두로 나가다 경쟁에서 밀려난 해리스 잉글리쉬(32·미국)나 도전을 좋아하는 브라이스 디섐보(27·미국) 등 상위권에 오른 선수들 모두가 출렁이는 마음을 다스리며 경기를 펼치는 모습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김시우의 데큐플 보기는 쉬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날 그 시간에 김시우의 마음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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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방민준의 골프세상' 바로가기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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