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기아(KIA) 클래식 우승을 차지한 박인비 프로가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골프한국] 골프는 무상(無常)하다.
흔히들 인생의 덧없음을 얘기할 때 무상이란 말을 쓴다. 불교에서 무상은 진리 그 자체다. 붓다도 “오직 변하지 않는 진리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라고 설했다.

골프 역시 모든 면에서 무상함을 절감케 한다. 골프의 세계를 깊이 알면 알수록, 핸디캡이 낮아질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골프의 무상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골프에선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명언은 골프의 무상성을 대변한다.

프로의 세계에서도 당대 최고의 선수가 맥없이 추락하는가 하면 무명선수가 느닷없이 나타나 우승하는 일이 일어난다. 매스컴은 ‘이변’ ‘반란’ ‘기적’ 같은 격한 용어를 동원해 마치 큰일이 벌어진 듯 흥분하지만 정작 선수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오랜 경험을 통해 골프에서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는 사실을 수없이 목격해왔기에 눈앞에 펼쳐진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해서도 ‘그럴 수도 있다’고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이다. 골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골프의 무상성을 깨닫고 경험했기 때문이리라. 

26~29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칼즈배드 아비아라GC(파72·6609야드)에서 열린 기아 클래식 첫 라운드부터 마지막 라운드까지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고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한 박인비(32)는 ‘골프 무상’의 진리를 무색케 했다.
최종합계 14언더파로 274타로 공동 2위(에이미 올슨, 렉시 톰슨)와 5타 차이의 완벽한 우승이다. 4라운드 내내 언더파를 쳤다.

박인비는 PGA투어의 타이거 우즈나 로리 매킬로이, 조던 스피스, LPGA투어의 고진영, 김효주, 박성현처럼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닮고 싶은 전범의 대상은 아니다. 

스윙은 교과서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짧은 백스윙에 힘이 제대로 실리는 것 같지 않은 4분의 3 스윙이다. 팔로우 스윙도 완성된 모습이 아니다. 오는 7월 만 33세이니 골퍼로서의 전성기를 지나고 있다. 결혼도 했다. 체형도 골프 하기 좋다고 보기 어렵다.

골프선수로서 이런 여러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그가 박세리 이후 가장 뛰어난 선수로 장기간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미국 언론이 그에게 붙여준 ‘침묵의 암살자(Silent Assassin)’란 수식어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멋진 샷을 날렸든, 미스샷을 날렸든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중요한 순간에 극적인 퍼팅을 성공시키고도 그가 보이는 동작이라곤 갤러리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짓는 정도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굴은 담담하다.

타이거 우즈 같은 어퍼컷이나 장하나나 김세영이 보여주는 역동적인 세리머니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미스샷 후 화를 못 이겨 낯빛이 변하거나 클럽으로 잔디를 찍는 행동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다소 무미건조해 보이고 무덤덤해 보이는 동작과 표정에 그의 무서운 저력(底力)이 숨어 있다.

그의 최대의 무기이자 장점은 심연을 알 수 없는 평정심(平靜心)이다. 미륵보살을 연상케 하는 엷은 미소 뒤에 숨은 그의 평정심은 완벽에 가깝다. 현존하는 골프선수 중 그의 평정심을 따를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멋진 기량을 발휘하느냐보다는 얼마나 평정심을 유지하는가를 놓고 자신과 씨름하는 것 같다. 고도의 평정심 유지를 위해 불필요한 동작이나 세리머니를 최소화한다는 느낌을 준다.

특히 이번 대회에서 유난히 그의 평정심이 돋보인 것은 10전11기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와 올림픽 2연패를 향한 열망이 그만큼 굳고 뜨거웠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는 2010년 기아 클래식이 창설된 이후 빠짐없이 출전했다. 우승만 없었을 뿐 준우승 3회 등 성적도 나쁘지 않았으니 도전을 중단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10전11기에 성공했다. 올림픽 2연패에도 청신호를 켰다. LPGA투어 통산 21승(메이저 6승 포함)째다.

박인비가 금강석 같은 평정심으로 ‘골프 무상’을 산산조각내는 와중에도 ‘골프 무상’을 증명하는 희생자와 수혜자들이 속출했다.

우승 경쟁에 나설 것으로 기대되었던 김세영, 박성현, 이정은6, 김인경 등은 컷의 문턱도 넘지 못했다. 지난해 US여자오픈 우승자 김아림도 대망을 품고 LPGA투어 정식 회원으로 도전에 나섰으나 컷 오프 당했다. 직전대회 우승자 오스틴 언스트도 것 통과에 실패했다.

“컷 통과가 목적이 아니다”며 복귀한 재미교포 주부선수 미셸 위 웨스트, 최나연, 청야니 등도 2라운드를 마치고 짐을 쌌다.
올 시즌 좋은 출발을 보인 전인지는 2라운드까지 중간합계 5언더파로 공동 4위에 오르고도 스코어 카드에 사인을 빠뜨리는 황당한 실수로 실격했다.

한편으론 고진영이 8언더파로 4위, 김효주가 7언더파로 공동 5위, 허미정이 5언더퍼 공동 10위, 유소연과 양희영, 신지은이 4언더파로 공동 12위에 오르는 등 모처럼 한국선수들이 리더보드 상단에 이름을 올리며 태극낭자의 도도한 흐름이 이어질 것이란 기분 좋은 조짐을 보였다. 

총상금 1050만 달러가 걸린 월드골프챔피언십(WGC) 델 테크놀로지 매치플레이에서도 여지없이 ‘골프 무상’이 증명되었다. 

25~29일(한국시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의 오스틴GC(파71)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세계랭킹 기준 상위 64명이 참가해 4명씩 16개 조로 매치플레이를 벌인다. 조별로 3라운드 성적 1위에 오른 선수가 8강전, 4강전, 결승전을 벌여 우승자를 가린다. 

세계랭킹 1위 더스틴 존슨, 2위 저스틴 토머스, 4위 콜린 모리카와, 5위 브라이슨 디섐보 등 막강스타들이 조별리그도 통과하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11번 시드의 로리 매킬로이도 ‘골프 무상’의 희생양이 됐다.

AFP 통신은 "이 대회에서 톱30 밖 선수들로만 4강 대진이 이뤄진 것은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세계랭킹은 물론 페덱스컵 랭킹 20위 안에 든 선수는 모두 4강 진출에 실패했다. 

29일 4강전에서는 32번 시드의 빌리 호셜과 31번 시드 빅토르 페레스(프랑스)가 각각 52번 시드의 맷 쿠차와 30번 시드 스콧 셰플러를 격파했다. 이어진 결승전에서는 빌리 호셜이 스콧 셰플러를 꺾었고 3·4위전에선 맷 쿠차가 빅토로 페레즈를 제쳤다.

이번 WGC 우승으로 상금 182만 달러(약 20억5,000만원)와 페덱스컵 포인트 550점, 메이저 출전권, 세 시즌 투어카드 등을 챙켜 ‘골프 무상’의 최대 수혜자가 된 빌리 호셜은 지난 2월 열린 WGC 워크데이 챔피언십에서도 공동 2위에 올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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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방민준의 골프세상' 바로가기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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