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 우즈가 지역 키즈 골프대회에서 아들 찰리의 골프백을 메었다. 사진은 (상단) 2019년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확정한 타이거 우즈가 아들과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다. (하단) 2015년 마스터스를 앞두고 열린 파3 콘테스트에서 딸 샘, 아들 찰리와 함께한 타이거 우즈. ⓒAFPBBNews = News1


[골프한국] 타이거 우즈(44)가 11살 아들 찰리를 위해 캐디로 나섰다. 

지난 6~9일 PGA챔피언십에서 참가해 공동 37위로 대회를 마친 우즈는 그길로 플로리다주 팜시티 해먹 크릭GC로 달려가 지역 키즈 골프대회에서 아들의 골프백을 메었다. 

외신에 따르면 찰리는 9홀 2467야드 코스에서 3언더파 33타를 쳐 우승했다. 공동 2위와는 무려 5타차로, 찰리만 유일하게 언더파를 쳤다. 

스웨덴 모델 출신 전 부인 엘린 노르데그렌과의 사이에 15살 딸 샘과 아들 찰리를 둔 우즈는 특히 아들의 골프 자질에 행복한 모습이다. 

찰리는 5살 때부터 각종 키즈대회에 참가해왔는데 그때마다 우즈는 만사를 제쳐두고 아들의 캐디로 나서거나 동행해왔다. 

2016년 US키즈골프 사우스플로리다 투어에서 공동 2위에 오르는 등 두각을 보였다. 2019년 US키즈 토너먼트에서는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우즈는 한 TV와의 인터뷰에서 “아들이 골프에 관심을 보이고 어떻게 경기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골프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보는데 내가 자랄 때 모습을 연상시킨다”며 “아들의 몸통 회전이 부럽다”며 영락없는 ‘아들 바보’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타이거 우즈의 특별한 아들 사랑 혹은 자랑에는 깊은 사연이 얽혀있다.

우즈는 스스로 자신의 인종적 혈통을 ‘캐블래이시언(CaBlAsian)’이라고 칭했다. 백인인 코캐이지언(Caucasian), 흑인인 블랙(Black) 그리고 동양인인 애이시언(Asian)을 모아 새로운 인류학 용어를 만든 것이다.

우즈는 서로 달라 보이는 인종을 두루 섞어 독특한 혈통으로 내세웠지만 그의 가슴엔 흑인의 피가 더 강하게 흐르고 있는 듯하다.

아들 찰리의 풀네임은 ‘찰리 액셀 우즈(Charlie Axel Woods)’다. 액셀은 엘린 노르데그렌의 오빠 이름에서 차용했는데 스웨덴 말로 ‘평화의 아버지’란 뜻이라고. 퍼스트 네임 찰리는 PGA투어 최초의 흑인 멤버인 찰리 시포드(Charlie Sifford, 1922~2015)에서 따왔다. 

▲2014년 1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자유훈장 받은 찰리 시포드. ⓒAFPBBNews = News1

‘골프계의 마틴 루터 킹’으로 칭송받으며 오늘의 타이거 우즈를 존재케 한 찰리 시포드는 미국 골프역사에서 인종 차별의 벽을 무너뜨린 역사적 인물. 흑인들에게는 최고의 골프영웅으로, 미국 골프계로부터는 현대 최고의 골퍼 중 한 사람인 타이거 우즈를 태어나게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찰리 시포드는 그 자체가 흑인골프의 역사다. 1961년 흑인 최초로 PGA투어에 출전했던 그가 자서전을 쓰면서 제목을 ‘다만 플레이를 할 수 있게 해달라(Just let me play)’라고 달 정도로 흑인골프의 역사는 고난과 핍박의 역사였다. 

1922년 노스캐롤라이나주 시골에서 태어난 시포드는 13살 때 동네 골프장에서 캐디를 하면서 골프를 배우기 시작, 흑인들만 참가하는 대회에 나가며 코치생활에 만족해야 했다. 1960년 이전 흑인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는 UGA(United Golf Association) 대회가 유일했는데 대회는 퍼블릭코스에서만 열리고 상금규모도 적었다. 이때 활약한 유명한 흑인 골퍼들이 바로 시포드를 비롯해 흑인골프의 개척자 테디 로즈, 피트 브라운. 리 엘더 등이다. 

시포드가 PGA투어에 처음 참가한 것은 1952년 피닉스오픈. 당시 복싱 세계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에게 한 장의 특별초청권이 주어졌는데 예선전을 통과한 시포드가 조 루이스의 배려로 이 초청권을 받아 출전할 수 있었다. 

첫날 첫 홀 그린에서 그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그린에 올라가니 홀이 인분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흑인의 출전에 항의하는 한 백인 갤러리의 소행이었다. 그의 부인이 인분을 치우고 홀을 교체한 후에야 플레이할 수 있었다. 

1957년 PGA 공식대회는 아니지만 PGA가 후원한 롱비치오픈에서 첫 우승을 한 시포드는 그의 끈질긴 투쟁 덕분에 1960년 흑인도 PGA 회원이 될 수 있도록 규정이 개정되면서 이듬해 비로소 투어카드를 획득, 흑인 최초로 PGA투어 그레이터 그린스보로 오픈에 참가할 수 있었다. 시포드는 이때의 코스 분위기를 “살해 협박의 공포를 느꼈을 정도”라고 자서전에서 술회했다. PGA투어 첫 우승은 1967년 그레이트 하트 포드오픈에서다.

흑인들에게 PGA의 문호가 개방된 후에도 꿈의 무대로 불리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코스에서 열리는 마스터스 토너먼트는 여전히 흑인들에게 난공불락이었다. 독자적인 규정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흑인으로서 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캐디가 되는 길뿐이었다.

그러다 1975년 흑인에게 클럽이 개방되면서 흑인 리 엘더(Robert Lee Elder)가 전년도 몬샌토오픈 우승자 자격으로 처음 출전했다. PGA투어 통산 4승과 시니어투어 8승을 거둔 리 엘더는 1979년 흑인 최초로 미국과 유럽의 골프대항전인 라이더컵에 미국 대표선수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고난과 핍박의 역사를 거쳐 1997년 타이거 우즈가 흑인 최초로 마스터스에서 우승, 그린재킷을 입고 황제로 등극했다. 어찌 찰리 시포드 없이 타이거 우즈가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흑인 최초로 PGA투어 2승의 기록을 세운 시포드는 2004년 흑인 최초로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7년에는 골프의 고향 세인트 앤드류스대학으로부터 명예법학박사를 받기도 했다. 

2014년 1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자유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았다. 미국 역사의 새 장을 여는 데 공헌한 인물에게 주는 이 상은 골퍼로서는 아놀드 파머(2004년)와 잭 니클러스(2005년)에 이어 세 번째다.

2015년 2월 5일 그가 사망하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그는 수모와 부당함을 이겨내고 첫 흑인 PGA투어 멤버가 됐다. 미국 스포츠의 미래 세대를 향한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추모했다. 
타이거 우즈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골프와 내 자신에게 큰 슬픔이다. 내 할아버지를 떠나보냈고, 우리 모두는 용기와 품위로 가득 찬 명예로운 한 인간을 잃었다. 당신을 그리워할 것입니다."라고 애도했다. 

우즈에게 찰리 시포드는 할아버지였다. 그 할아버지의 아픔과 영광으로 자신의 오늘이 완성되었고 이제 그 맥을 아들 찰리에게 이어주고 싶은 것이다.
타이거 우즈의 아들 사랑은 인류의 도도한 흐름이다.

추천 기사: LPGA 메이저 'AIG 여자오픈'을 즐기는 관전 포인트 3가지

관련 기사: 플레이오프 입성한 '코리안 5인방', 우승상금 20억원 '잭팟' 터지나

추천 칼럼: LPGA 우승자 스테이시 루이스가 일으킨 '기부의 힘, 엄마의 힘'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저작권자 © 골프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