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칼럼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골프한국

[골프한국] 한해가 노루 꼬리만큼 남은 어느 날 겨울 라운드에 나섰다.

오랜만에 필드에서 만난 동반자들은 클럽하우스에서 목을 축인 막걸리 탓도 있지만 겨울답지 않은 날씨에 늘 경험하는 라운드 직전의 가벼운 흥분에 들떠 있었다. 

대기 중인 카트에 다가가자 배정된 캐디가 “복 많은 고객님들이시네요.”하며 반갑게 맞으며 목례를 했다. 

“복 많은 고객님이라니 무슨 뜻이지?”
“한겨울에 이렇게 포근한 날씨에 라운드하시니 복 많은 분 아니세요?”
“듣고 보니 그러네.”

나이를 짐작할 수는 없었으나 후덕한 체격에 살짝 익살스런 면이 엿보였다. 첫 홀로 이동해 대기하면서 캐디는 각자 어프로치에 즐겨 사용하는 클럽을 물어보고 골프채와 주인을 식별한 뒤 스트레칭 준비를 했다. 

“좀 귀찮으시겠지만 좋은 라운드를 위해 잠깐 스트레칭 하는 게 좋아요. 스트레칭 마다하고 첫 티샷 제대로 치시는 분 안 계시더라구요.”
보통 캐디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캐디의 이 한 마디에 일행은 캐디를 따라 충실하게 스트레칭을 했다.

날씨 덕분인지 캐디의 한 마디 덕분인지 모두 첫 홀 티샷을 성공적으로 날렸다. 

세컨 샷 지점에 카트를 세운 캐디는 클럽을 뽑는 일행에게 “오늘 그린은 거의 안 튈 거예요. 그리고 잔디를 깎지 않아 별로 구르지 않으니 그린 깃대 보고 힘껏 쏘시면 돼요”하고 힘주어 말했다. 마치 토끼들이 뛰노는 들판에 사냥개를 풀어 놓은 개 주인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 정도로 카리스마와 신뢰가 전해졌다.

캐디의 암시가 약효를 발휘했는지 세 사람이 파온에 성공했고 한 사람은 엣지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첫 홀 모두 파에 성공, ‘올 파’가 만들어졌다.

“첫 홀을 일파만파나 무파만파로 시작하면 왠지 캐디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아요. 자력으로 올파를 하시니 오늘은 자존심이 서는데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렇지요?”
“못이긴 척 올파를 수용하지만 우리라고 자존심 없겠어?”

예사롭지 않은 캐디와의 드문 라운드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홀이 늘어갈수록 캐디의 진면목이 서서히 드러났다.

두 번째 홀을 지난 뒤 캐디는 일행의 아이언이나 우드 비거리를 거의 파악하고 원하는 클럽을 정확히 건네주었다. 각자의 구질도 금방 파악해 샷을 날릴 방향도 정확히 짚어주었다.

특히 그린 읽는 눈이 탁월했다. 퍼팅할 때 캐디는 일행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고집부리지 않고 “잠깐 기다려보세요. 다시 한번 확인해 볼게요.”하곤 라인 주변을 훑어본 뒤 퍼팅 방향을 잡아주었다. 스트로크가 문제였지 방향은 정확했다. 

무엇보다 누군가 버디를 하거나 어려운 파 세이브에 성공하면 격하게 환호하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러면서도 누가 헤맬 땐 다른 일행이 버디나 파를 해도 입을 다물고 있다 살짝이 다가와 “OB 난 분이 계셔서 큰소리로 축하 못 해드렸어요.”하고 말했다.

누군가 미스 샷을 하면 자기 일처럼 아쉬워하며 다음 홀에서는 그런 실수 하지 말 것을 마음 상하지 않게 당부했다. 

특히 짧은 퍼팅을 자주 놓치는 일행을 위해 그녀가 취한 행동은 놀라웠다. 자신이 직접 충고하지 않고 다른 동반자에게 “○○○선생님 퍼트할 때 퍼터 페이스가 살짝 오픈 되는 것 같지 않아요?”하고 물은 뒤 고수가 “나도 그것을 지적하고 싶었는데 나중에 하려고 했지”하는 대답을 듣곤 당사자를 찾아가 “선생님 퍼트할 때 페이스가 열리는 것을 인정하셔야 해요. 그렇지만 않았으면 두세 타 줄일 수 있었는데….”하며 자연스럽게 스스로 잘못을 깨닫도록 했다.

캐디의 충고를 들은 그 동반자는 다음 홀에서 그대로 실행해 짧은 퍼팅을 성공시키곤 캐디에게 마음에서 우러난 고마움을 표시했다.
20대 중반에 캐디를 시작해 지금 40이 조금 넘었다고 했다. 캐디로서의 그의 능력은 경력을 뛰어넘어 최상급이었다. 

그의 다른 진가는 전반 중반을 지나서 드러났다.

일행 중에 강원도가 고향인 사람과 사투리로 농담을 주고받더니 어느 항구도시의 시장통 얘기로 화제가 좁혀지자 긴장의 끈을 풀었다. 횟집 아줌마, 젓갈집 아줌마 얘기도 나오며 꽤 질펀한 대화가 이어졌다.

일행이 포켓용 용기에 담아온 양주를 건네자 흔쾌히 받아 마시곤 “오랜만에 맡아보는 향기네요! 회가 동하면 안 되는데….”하고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화제가 위험한 선 근처까지 갔다 싶어도 거부감없이 수습하며 캐디 본연의 자세를 결코 흩뜨리지 않았다. 카트 안에선 손님들과 허물없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필드에선 진지하게 캐디의 임무에 충실한 그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전반을 끝내고 그늘집에 도착하자 약속이나 한 듯 동반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캐디 칭찬을 했다.

“많은 캐디를 만났지만 저런 캐디는 처음이야.”
“마치 선술집에 마주 앉은 느낌이야.”
“보통은 좀 경력이 쌓이면 되바라지고 동반자를 가지고 놀기도 하는데 캐디 직무에 충실하면서 대화를 저렇게 풀어갈 줄 알다니 거의 국보급이야.”
“그런데 왜 우리가 저 캐디를 처음 만났지요? 여기서 10년 이상 있었다는데….”
“그러게 말이요. 캐디 지정제 하면 딱 좋을 텐데.”
“유능한 모범 캐디는 만난 적이 있지만 저렇게 유능하면서도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캐디는 처음인걸.”
“캐디가 모두를 갖추기가 어려운데 완벽에 가까워.”
일행 모두가 캐디에게 감동 받은 모습이었다.

각자 게임이 뜻대로 풀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캐디 본연의 임무에 탁월하면서도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지혜로운 캐디와 라운드를 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기쁨인가를 절감한 라운드였다. 

“오늘 정말 ○○○씨를 만난 게 큰 행운이었어.” 
“뭘요? 제가 더 즐거웠어요. 오늘 선생님들께 많이 배웠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카트 곁에서 작별하는 캐디와 일행의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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