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도쿄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은 박세리 프로. 사진=골프한국


[골프한국] 박세리(42)만큼 슬럼프의 주술에 걸려 마음고생을 한 경우도 드물 것이다.

2004년 박세리(당시 27세)에게 찾아온 슬럼프는 본인은 물론 옆에서 지켜보는 골프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2001∼2003년까지 3년 연속 상금랭킹 2위를 달리다 2004년 11위, 2005년에는 102위로 추락했다.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에 막혀 3년 연속 상금랭킹 2위에 머물렀던 박세리는 2004년 시즌을 앞두고 “2인자는 지겹다”며 '넘버원'에 도전하겠다는 당찬 각오를 밝혔다. 

초반 2개 대회 연속 '톱10'을 시작으로 5월까지 5개 대회에서 3차례 '톱10'을 이뤄낸 데 이어 5월 미켈롭울트라오픈에서 우승할 때까지만 해도 박세리의 ‘넘버원’ 꿈은 가능해 보였다.
미켈롭울트라오픈 우승으로 ‘명예의 전당’ 입회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한 박세리는 그러나 다음 대회부터 끝모르는 부진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2개 대회 연속 컷오프라는 수모도 맛봤다.

꿈에 그리던 명예의 전당 입회라는 목표를 이룬 뒤의 일시적 허탈감이려니 했지만 그의 추락은 바닥을 몰랐다. 오버파 스코어가 나오는가 하면 80대 스코어를 치기도 했다. 

2005년은 더했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맹훈련을 했다”고 말했지만 시즌 초반부터 성적은 바닥을 헤맸다. 4월 나비스코챔피언십 공동 27위가 가장 좋은 성적이었고 이후 컷 오프, 기권을 거듭했다. 

한마디로 ‘총체적 슬럼프'였다. 80대 타수가 속출했고 언더파 스코어는 34라운드 중 고작 8차례에 불과했다. 손가락 부상을 이유로 '병가'를 내고 담금질을 했지만 2006년 시즌에도 변화는 없었다. ’박세리도 끝났다‘는 말이 나왔다. 

골프 문외한에게는 물론 골프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도 박세리의 길고 긴 슬럼프는 불가해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골프의 속성이 천국과 지옥 사이에 걸쳐진 외줄 위의 곡예나 다름없어 애당초 추락 없는 골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박세리의 경우는 미스터리 중의 미스터리로 보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듬은 흠 잡을 데 없는 스윙, 든든한 배짱, 그리고 화려한 우승기록과 다양한 실전경험 등을 생각하면 한 경기 또는 한 계절의 슬럼프는 있을지 몰라도 2년이 넘는 긴 슬럼프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악성 슬럼프는 박세리에게만 찾아온 것은 아니다. 

한때 타이거 우즈와 함께 세계 랭킹 1위를 다투던 데이비드 듀발(47·PGA투어 통산 13승)이 2002년부터 슬럼프에 빠져 여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메이저 5승을 포함해 LPGA투어 통산 15승의 청야니의 슬럼프도 악명 높다. 2008년 신인상을 시작으로 2012년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우승컵을 챙겼고 2012년에는 메이저 2승을 포함 무려 7승을 올렸으나 2013년부터 추락하기 시작, 이후 승수를 추가하지 못하고 컷 통과에 급급해하고 있다. 

메이저 1승을 포함 LPGA투어 통산 9승을 올린 최나연도 2015년 2승을 올린 이후 승수를 추가하지 못하고 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매년 1~2승을 올렸던 그는 2016년부터 지금까지 바닥을 헤매며 컷 통과도 힘든 부진의 터널에 갇히고 말았다.


슬럼프(Slump)란 원래 지질학 용어다. 바위처럼 굳어지지 않은 퇴적층을 지탱해주던 경사면 밑부분의 토양이 유실되면서 퇴적층이 미끄러지거나 흘러내리는 현상을 말한다. 일상적으로는 일시적인 부진이나 난조(亂調), 한계를 의미한다. 

박세리의 경우를 참고해 아마추어 골퍼들이 겪는 슬럼프를 생각해보자. 

주말골퍼들은 연습을 게을리하면서도 스코어가 기대에 못 미치면 절망하고 분노에 휩싸이기 일쑤다. 구력 수십 년에 싱글을 친다는 골퍼 역시 느닷없이 찾아오는 슬럼프에 심한 배반감을 느끼며 골프와 결별할 것을 수없이 다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로선수의 절망감과는 다르다. 몸에 밴 습벽이 골프의 기본과 거리가 멀고, 평소 연습을 게을리한다거나, 집중하지 못한다거나 자신의 취약점을 알기 때문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슬럼프가 그렇게 황당하지는 않다.
그래서 박세리 같은 세계 정상급 골퍼가 2년여 동안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이런 박세리가 2006년 메이저대회인 맥도널드챔피언십에서 호주의 카리 웹과 연장 접전 끝에 우승컵을 안음으로써 슬럼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골프에서 슬럼프란 마치 유령의 주술과 닮았다. 느닷없이 슬럼프란 유령이 다가와 풀리지 않는 주술을 걸어놓곤 슬그머니 사라진다. 유령이 주술을 걸어놓고 떠나버렸으니 저절로 주술이 풀릴 리가 없다. 대개는 주술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스스로 포기한다.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극히 소수만이 자신의 내부에서 주술을 푸는 열쇠를 찾아내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슬럼프에 빠진 골퍼들은 하나같이 ‘이유 없이, 갑자기’ 슬럼프에 빠졌다고 생각하지만 깊이 따지고 들면 분명 이유가 있다. 다만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이다. 
박세리도 오랜 고통의 나날을 보낸 뒤에야 추락의 원인을 깨달았다고 한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뒤 찾아온 목적 상실에 따른 허탈감, 골프를 빼면 의미를 찾기 힘든 단조로운 일상, 결혼 적령기를 맞은 여인 특유의 초조감, 실력 있는 후배들의 등장, 골프가 아닌 취미생활 부재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신감 상실과 강박관념, 조바심 등을 초래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박세리가 아버지에게 “왜 아빠는 나한테 노는 법을 안 가르쳐줬느냐”고 눈물을 흘리며 따졌겠는가.
선수로서 혹독한 슬럼프를 겪은 그는 제2의 전성기를 준비하고 있다. 2020년 도쿄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는 한편 최근 그동안의 경험을 사업으로 접목시키고 유소연 선수 지원을 위한 스포츠전문회사를 설립했다.

골프에서 슬럼프라는 주술을 푸는 열쇠는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자.


※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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