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제공=방민준


[골프한국] 골퍼에게 3월은 빛이요 희망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3월은 모두가 기다려온 계절이지만 특히 하얀 볼과 눈부신 클럽 페이스에 혼을 빼앗긴 골퍼들에겐 3월은 긴 어둠의 터널 끝에서 맞이하는 태양이다. 아무리 간절한 애인이라도 이처럼 목 놓아 손꼽아 기다려온 애인이 달리 있을까. 골퍼에게 3월은 가슴 속 깊이 간직해온 애인과 대면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려온 3월을 성공적으로 품에 안는 행운을 누리는 골퍼는 극히 드물다.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서사시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라고 노래했다. 영국의 4월은 한국에선 3월에 해당되는 계절이다. 엘리엇의 4월을 3월로 옮겨 감상하면 이 시의 느낌이 한결 실감나게 가슴에 와 닿는다.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쉽게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 (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봄을 맞아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죽음과 같은 땅에서 깨어나 생명을 키워내려는 치열한 몸부림이 전해진다.

이 땅의 골퍼들에게 3월은 잔인한 계절의 서막일 뿐이다. 푸른 잔디가 갈색을 완전히 뒤덮는 5월까지 골퍼들은 계절이 안겨주는 가혹한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긴 겨울 도약과 비상 아니면 소박하게 현상유지나 작은 개선을 꿈꾸며 연습에 몰두해온 골퍼들에게 새로이 맞는 3월은 각별하다.
3~4개월의 휴지기를 보내고 맞는 3월은 골퍼들에게 긴 어둠의 터널 끝자락이다. 어둠의 터널 속에서 골퍼들은 터널의 끝이 예전과 다르리라는 꿈을 갖고 무서운 인내심을 발휘하며 터널이 끝나기를 기다려왔다.

골퍼들은 터널이 끝나면 눈부신 태양이 빛나고 그 태양 아래 파릇한 초원이 펼쳐지고 주변에 이름 모를 야생화가 다투어 피어나는 모습을 꿈꾼다. 일렁이는 아지랑이 너머로 다가오는 자주색 몽우리 봉오리에 뒤덮인 주변 산야는 속세를 잊게 할 터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겨우내 갈고 닦은 기량을 멋지게 재현해내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찌 가슴이 뛰지 않겠는가.
 
그러나 가슴 태우며 손꼽아 기다려온 봄, 3월은 골퍼들의 기대를 철저하게 배반하고 가혹한 상실감을 안긴다.
겨우내 가슴 속에 품어온 기대와 희망이 환상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깨어진 환상의 후유증은 길게 이어진다. 
  
3월부터 이어지는 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계절이 골퍼에게 잔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다.
평소 연습과 담을 쌓고 스코어에 대한 집착도 시들한 골퍼는 그들대로 보통 때와 같을 수 없는 스윙과 그에 따른 형편없는 스코어에 배신감과 실망감을 피할 수 없다. 지난해 전성기 때의 기억만 남아 현재의 모습에 좌절감마저 느낀다. 그러나 겨우내 골프채를 창고에 처박아둔 채 연습 한번 제대로 못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받아들여 그다지 괴로워하진 않는다.
 
문제는 겨우내 열심히 연습에 몰두한 사람들이다.
그동안의 잘못된 골프를 뜯어고치기 위해, 그럭저럭 버텨오던 것을 확실한 경쟁력을 갖춘 수준으로 높이기 위해, 지금껏 만족해 왔지만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새로운 골프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겨울동안 동계훈련 하다시피 연습에 열중한 골퍼들에게 봄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연습장에서 한 방향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볼을 보며 화려한 봄을 상상한다. 대부분의 샷은 연습한 만큼 뜻대로 만들어질 것이고 스코어카드는 이어지는 0의 행진에 가끔 버디가 추가되는 이상적인 그림을 보여줄 것이다.
자연히 주변의 봄을 완상하는 여유도 즐길 것이다. 누른 잔디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파란 잔디가 눈에 들어오고 양지 바른 비탈에 핀 작은 들꽃도 보이리라. 나뭇가지마다 맺힌 터지기 직전의 자주색 몽우리와 봉오리가 눈에 들어오고 개울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도 귀를 간질이리라. 좀 더 여유가 있다면 갓 알 껍질을 뚫고 나온 작은 벌레까지 발견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겨우내 열심히 갈고 닦은 사람도 골프장에 도착하는 즉시 모든 것이 돌변한다.

머릿속은 환상과 기대와 개화(開花)로 차있다. 겨우내 연습한 멋진 스윙, 쭉쭉 뻗어나가는 볼, 보기 좋은 스코어카드만 어른거린다. 연습장에서 날리던 샷 재연의 기대는 첫 홀부터 깨지기 마련이다. 다행히 무사히 첫 홀을 넘겼다 해도 난조는 시간문제다. 페어웨이나 그린의 상태도 상상하던 것과는 거리가 멀다.

연습장에서의 샷 성공률이 60~70%였다면 현장에선 30~40%를 넘기 어렵다. 그런데 마음은 100%를 갈망한다. 성공률이 50%만 되어도 대성공이다. 프로선수들도 한 라운드에 마음에 드는 샷이 다섯 손가락을 채우지 못할 정도라는데 100%를 갈망하니 자연스러운 샷이 나올 수 없다.
때때로 겨우내 골프채도 제대로 잡아보지 않은 사람이 의외로 무난한 스코어를 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경우 연습을 안했으니 욕심이나 큰 기대도 없다. 별수 없이 큰 기대를 갖지 않고 겸손하게 접근하게 된다. 큰 욕심 없이 겸손하게 다가오는 사람에게 골프는 관대한 편이다.
 
내 기억에 3~4월을 무난히 넘긴 적이 거의 없다. 겨우내 열심히 연습 했는데도 3~4월은 잔인했고 가혹했다.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이 기간이 개화를 위해 홍역을 앓는 기간임을.
마치 산야의 수목이 잎과 꽃을 틔우기 위해 추위와 조갈(燥渴)을 견디며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듯 골퍼에게도 3~4월은 개화를 위한 준비 기간임을 깨달았으면 싶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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