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한국] 무림의 고수들은 일합을 겨루어 보지 않고도 고수를 알아본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눈빛, 짧은 수인사, 그리고 미세한 몸 동작 하나를 보고 상대의 무술 수준을 간파해낸다. 그리곤 어느 한쪽이 순순히 하수임을 시인한다. 꼭 원한을 풀어야 할 그런 관계가 아니라면 서로 피를 보지 않고 스승과 제자, 형과 아우가 된다. 

골프의 고수들도 라운드를 해보지 않고도 동반자들의 골프 수준을 간파하는 비법을 터득하고 있다. 싱글 핸디캐퍼라면 첫 홀 티잉 그라운드에서 티샷을 하기 전에 동반자들의 골프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골프카트에 실려 있는 골프백의 내용물을 보면 주인의 골프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다. 유명 브랜드의 최신형으로 갖춰져 있다면 거의 초보자로 보면 틀림없다. 결코 클럽이 손에 익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커버도 깨끗하고 그립도 생생하다면 연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반면 이것저것 뒤섞여 있으면 대단한 고수라고 봐야 한다. 자신에게 주무기가 될 수 있는 병기만을 골라 편성한 조합일 테니 모든 클럽이 손에 익었다는 뜻이다. 소문만 듣고 마구잡이로 클럽을 사지 않고 내 손과 체형에 맞는지 검증을 거쳐 선택했다는 증거다.

다른 부수적인 장비를 봐도 골프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달랑 장갑 한두 켤레에 티나 마커도 별로 여분이 없다면 다양한 상황에 따른 대응력이 취약하고 동반자 대신 마크를 하고 여분의 티를 빌려주는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볼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냥 아무 표시도 없이 볼을 사용하는 사람, 내 볼인지 여부만 가리기 위한 간단한 표시만 하는 사람. 정성껏 나름의 의미 있는 표시를 하는 사람의 골프가 같을 수 없다. 

장비가 아니더라도 첫 홀 티잉 그라운드 주변에서의 행동은 무언으로 주인공의 골프수준을 드러낸다. 라운드에 임하기 위한 준비물 챙기기가 얼마나 철저한지, 스트레칭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연습스윙의 궤도가 어떤지를 보면 그 사람의 골프수준을 80% 이상 짐작할 수 있다. 그 다음 티잉 그라운드에서의 첫 티샷을 보면 전모가 드러난다고 보면 틀림없다. 

라운드를 돌지 않고도 정확히 그 사람의 골프수준을 알 수 있다. 매우 사소해 보이는 루틴들, 이를 테면 잔디를 뜯어 날리며 바람의 세기를 가늠해보고 티박스 어디가 티샷하기 좋은지 살피고, 에이밍을 잘 했는지 확인하고, 볼의 라인을 목표선과 정확히 일치시키고, 가벼운 왜글을 한 뒤 머뭇거림 없이 샷을 하는 과정에 그 사람의 골프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티샷 직전의 많은 동작 중에서도 골프수준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립이다. 그립이 한 사람의 골프수준 전부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립은 골프 스윙의 출발점이다. 그립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좋은 구질과 거리를 확보할 수 없다. 

1920~1930년대 당대 최고의 골퍼인 월터 헤이건과 불멸의 아마추어 골퍼로 ‘구성(球聖)’으로 추앙받는 로버트 타이어 존스 주니어(바비 존스), 그리고 지방 소도시의 무명 골퍼가 벌이는 36홀 시범경기를 다룬 골프철학소설 ‘배거밴스의 전설’(스티븐 프레스필드 지음)에 그립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가히 압권이다. 

소도시 대표선수의 캐디로 배거 밴스라는 신비스런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립은 사람이 자기 밖의 세계와 자신 안의 세계를 연결시키는 통로다. 손은 나와 내가 아닌 것이 만나는 곳, 주체가 객체를 만나는 곳, ‘여기 이 안에’ 있는 내가 ‘저기 저 밖에’ 있는 세상을 만나는 곳이다. 참된 지능, 진짜 지혜는 머릿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손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손과 클럽이 만나는 그립은 나와 골프장비와 볼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이자 접점이다. 이 통로가 잘못돼 있다면 골프도 잘못 돼 있다는 뜻이다. 프로골퍼나 레슨프로들이 그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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