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한국] 혹한이 기승을 부리던 며칠 전 썰렁한 동네 골프연습장에 한 낯선 어르신이 나타났다.

독일제 고급승용차를 타고 운전기사의 안내로 연습장에 들어선 어르신은 혼잣말로 “라운드 약속이 잡혔으니 추워도 연습은 해둬야지.”하며 골프백에서 주섬주섬 장갑을 꺼냈다. 얼핏 80은 훌쩍 넘어보였으나 지팡이의 도움 없이 균형 있게 걸음을 걸었고 허리도 굽지 않았다. 얼굴에 주름도 별로 없어 부유한 노년을 보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의 외부온도가 영하 10도 전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어르신은 전기히터와 가까운 타석에 자리 잡고 연습 준비에 들어갔다. 가볍게 몸통을 좌우로 돌리는가 하면 허리를 앞으로 굽혔다 뒤로 제치는 운동을 한참 하더니 아이언클럽을 꺼내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볼을 쳐냈다. 몸통 회전도 제대로 되고 백스윙의 높이도 어깨 위까지 올라갔다. 다만 스윙의 속도가 느려 볼은 그리 멀리 날아가는 편은 아니었다.

당시 주변에 대여섯 명이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어르신의 연습 모습을 지켜보곤 휴게실로 들어와 이구동성으로 “대단하신 어른이시네!”하며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지금까진 우리 골프장에선 84세 된 어른이 최고 연장자여셨는데 이제 기록이 깨지게 되었네요.”
“정확히 연세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아직 골프채를 휘두를 수 있다니 우리가 반성해야겠어요.”
누군가 이 말을 내뱉자 어르신을 모시고 온 운전기사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저 어르신의 비서 겸 운전기사인데요, 지금 주민등록상으로는 99세, 실제 나이는 96세 됩니다.”
휴게실에 있던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얼마나 궁금한 게 많던지 어르신에 대한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질문에 대한 비서의 대답을 종합해보면 대충 이랬다.
어르신은 이북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피난 와 이런저런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 금융회사를 차려 성공적으로 경영해왔고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 출근한다고 했다. 골프는 50세 넘어 시작했는데 마나님과 함께 광적으로 좋아해 일주일에 두세 번은 라운드를 했단다. 3년 전 마나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함께 라운드를 했다고 한다. 라운드 파트너는 지금은 아들 딸이나 손자 손녀들이지만 3년전 만 해도 가족이 아닌 친구나 후배들과 가끔 라운드를 했는데 모두 죽거나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별수 없이 가족들과 라운드 한다고 했다.
어르신을 모신지 20년이 다 되어간다는 비서는 최근 2~3년 사이 감기 한번 걸린 적이 없고 냉장고에 고기를 쌓아놓고 드실 정도로 육식을 엄청 좋아하신단다. 그런데도 혈압은 정상이고 콜레스테롤 수치 이상이나 당뇨병 같은 것도 없다고 하신다.

어르신이 연습을 멈추고 휴게실로 들어서자 한 지인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 대단하십니다. 저희가 부끄러워지는군요.”
그러나 어르신은 주변을 씨익 훑어보더니 “며칠 연습 안했더니 감이 안 와요. 감 잡으려면 며칠 나와야겠어요.”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이후에도 어르신은 여전한 모습으로 연습장에 나타나 한 박스나 한 박스 반을 치곤 하신다.  
골프백을 챙겨 연습장을 나서는 어르신을 볼 때마다 내 귀에는 이런 소리가 들린다.
“저승사자가 날 데리러 오거든 라운드를 끝내려면 아직 홀이 많이 남았다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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