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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준의 골프세상] 'PGA 우승' 캐머런 챔프가 펑펑 울 수밖에 없는 사연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2019년 PGA 투어 세이프웨이 오픈 골프대회 우승을 차지한 캐머런 챔프. ⓒAFPBBNews = News1


[골프한국] 2018년 10월 PGA투어 샌더슨 팜스 챔피언십에서 신인으로 두 번째 대회 만에 첫 승을 올린 캐머런 챔프(24)는 할아버지 맥 챔프와 아버지 제프 챔프를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로부터 챔프는 1년이 지난 9월 30일(한국시간) 세이프웨이 오픈에서 애덤 해드윈(31·캐나다)을 1타 차로 누르고 우승한 뒤 아버지 제프 챔프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휴대폰으로 위암으로 호스피스 병원에서 투병 중인 할아버지와 통화하며 눈물을 쏟았다.

챔프는 병원에서 중계방송을 지켜본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저 우승했어요!” 이 한 마디를 토해내곤 북받쳐 오르는 감정으로 말을 잊지 못했다. 

그는 경기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야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며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준 가족들에게 이 우승을 바친다”고 말했다.

오늘의 캐머런 챔프는 할아버지 맥 챔프 때문에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심한 인종 차별을 받아온 할아버지 맥 챔프는 자신에게 금지되었던 골프를 손자에게 가르쳤고 3대 만에 걸출한 골프 스타를 탄생시켰다.
 
흑인에게 골프가 금지되었던 시대에 골프가 하고 싶었던 할아버지 맥 챔프는 텍사스 골프장에서 캐디 일을 했다. 인종차별을 실감하며 자란 그는 19세에 공군에 입대, 월남전에 참전했고 전쟁이 끝나자 영국, 독일에서 근무했다.

유럽에서 백인 여자와 결혼, 귀국해서는 인종 차별이 심한 텍사스를 떠나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아버지도 백인 여자와 결혼, 캐머런 챔프는 거의 백인에 가까운 외모를 지녔지만 할아버지는 흑인의 피가 흐르는 손자에게 2살 때부터 골프를 가르치며 흑인차별의 아픈 경험을 전해주었다. 

최고의 비거리를 자랑하는 그의 스윙은 “온 힘을 다해 스윙하고 좋은 결과를 기다려라”는 할아버지 가르침의 산물이다. 
“어디에서 시작했는가보다는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하다”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그에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습관을 갖도록 했다.

골프가 금지된 흑인들의 비애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PGA투어의 최초의 흑인 멤버인 찰리 시포드(Charlie Sifford, 1922-2015)가 남긴 자서전에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골프계의 마틴 루터 킹’으로 칭송받으며 오늘의 타이거 우즈를 존재케 한 찰리 시포드는 미국 골프 역사에서 인종 차별의 벽을 무너뜨린 역사적 인물이다.

흑인들에게는 최고의 골프영웅으로, 미국 골프계로부터는 최고의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가 나타날 수 있는 토양을 만들며 골프의 수준과 외연을 확장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찰리 시포드 자체가 흑인골프의 역사다.
자서전 제목을 ‘다만 플레이를 할 수 있게 해달라(Just let me play)’라고 달 정도로 흑인골프의 역사는 고난과 핍박으로 점철되었다.

1922년 노스캐롤라이나주 시골에서 태어난 시포드는 13살 때 동네 골프장에서 캐디를 하면서 골프를 배우기 시작, 흑인들만 참가하는 대회에 나가며 골프코치 생활에 만족해야 했다. 1960년 이전 흑인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는 UGA(United Golf Association) 대회가 유일했는데 퍼블릭코스에서만 열리고 상금 규모도 매우 적었다. 이때 활약한 유명한 흑인 골퍼들이 시포드를 비롯해 흑인골프의 개척자 테디 로즈, 피트 브라운. 리 엘더 등이다. 

시포드가 PGA투어에 처음 참가한 것은 1952년 피닉스오픈. 당시 복싱 세계 헤비급챔피언 조 루이스가 한 장의 특별 초청권을 갖고 있었는데 예선전을 통과한 시포드가 조 루이스의 배려로 이 초청권을 받아 출전할 수 있었다. 

첫날 첫 홀 그린에서 그가 겪은 황당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린에 올라가니 홀이 인분으로 채워져 있었다. 흑인의 출전에 항의하는 한 백인 갤러리의 소행이었는데 시포드의 아내가 인분을 치우고 홀을 교체한 후에야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1957년 PGA공식대회는 아니지만 PGA가 후원한 롱비치오픈에서 첫 우승을 한 시포드는 그의 끈질긴 투쟁 덕분에 1960년 흑인도 PGA투어 회원이 될 수 있도록 규정이 개정되면서 이듬해 비로소 투어카드를 획득, 흑인 최초로 PGA투어 그레이터 그린스보로 오픈에 참가할 수 있었다.
시포드는 이때의 코스 분위기를 “살해, 협박의 공포를 느꼈을 정도”라고 자서전에서 술회했다. PGA투어 첫 우승은 1967년 그레이트 하트 포드오픈에서다.

흑인들에게 PGA의 문호가 개방된 후에도 꿈의 무대로 불리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코스에서 열리는 마스터스 대회는 여전히 흑인들에게 난공불락이었다. 오거스타만의 독자적인 규정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흑인으로서 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캐디가 되는 길뿐이었다. 

그러다 1975년 흑인에게도 클럽이 개방되면서 흑인 리 엘더(Robert Lee Elder)가 전년도 몬샌토 오픈 우승자 자격으로 처음 출전했다. PGA투어 통산 4승과 시니어투어 8승을 거둔 리 엘더는 1979년 흑인 최초로 미국과 유럽의 골프대항전인 라이더컵에 미국 대표선수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고난과 핍박의 역사를 거쳐 1997년 타이거 우즈가 흑인 최초로 그린재킷을 입고 황제로 등극했으니 타이거 우즈 역시 찰리 시포드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인 최초로 PGA투어 2승의 기록을 세운 시포드는 2004년 흑인 최초로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7년에는 골프의 고향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으로부터 명예법학박사를 받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은 그는 2015년 92세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오바마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그는 수모와 부당함을 이겨내고 첫 흑인 PGA투어 멤버가 됐다. 미국 스포츠의 미래 세대를 향한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추모했다.
타이거 우즈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골프와 내 자신에게도 큰 슬픔이다. 내 할아버지를 떠나보냈고, 우리 모두 용기와 품위를 지닌 명예로운 한 인간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우즈가 한때 아내였던 스웨덴의 엘린 노르데그렌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 ‘찰리 액셀 우즈(Charlie Axel Woods)’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찰리 시포드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고 있다.

타이거 우즈의 아버지 얼 우즈가 그랬듯 할아버지 맥 챔프는 손자인 캐머런 챔프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고 아버지 제프 챔프 역시 아들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캐머런 챔프의 눈물에는 흑인골프의 개척자 찰리 시포드, 자신을 골프의 길로 인도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자신의 우상인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에 대한 만감이 녹아 있으리라.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입력날짜 : 2019-10-02 08: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