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제공=방민준


[골프한국] 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듯 누대에 걸친 나의 조상 역시 어느 순간 나타난 것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시원(始原)에서 비롯된 인연들이 현재의 내게로 이어져 내려온 것일 뿐이다.

나를 존재케 한 부모의 만남 또한 수많은 인연이 뒤얽혀 이뤄진 것일 터이다. 나라는 존재는 우주의 블랙홀처럼 아득한 시절에서 이어져온 인연의 끝자락이고 내가 만들어낸 인연은 나의 자손으로 이어져 내려갈 것이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이 지구가 태어난 이래 켜켜이 쌓인 지층의 맨 위이듯 현재의 내 존재 또한 내 선조들의 쌓은 수많은 DNA 지층의 맨 바깥쪽일 뿐이다.
 

구력 30년을 넘기면서 골프야말로 철저한 연기(緣起)의 스포츠란 사실에 놀란다.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 모든 것은 인연(因緣)따라 일어난다는 뜻이다. 불교의 핵심철학으로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얻은 귀중한 깨달음이다.

이 연기론에 따르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나거나 또는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다른 모든 존재와 여러 원인,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이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할 뿐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시각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잡아함경의 한 구절이 연기론을 함축하고 있다.
 

구력, 나이가 각각 다르고 실력도 다른 A, B, C, D 네 명이 라운드를 한 뒤 스코어카드를 받아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연장자인데다 구력도 긴 A는 평소와 비슷하게 80대 중반의 스코어를 기록했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느라 연습할 시간이 없어 라운드 전날 연습장에 가는 정도다.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않아 스윙은 교과서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으나 나름대로 요령을 터득해 자기류의 골프문법을 갖고 있다. 구력이 30년을 넘다보니 위기상황에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마음의 동요도 심하지 않다. 세 번에 한 번 정도는 70대를 치지만 스코어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 분위기에 맞춰 음주라운드도 즐길 줄 알고 90대 타수를 쳐도 “그럴 때도 있지 뭐!”하고 웃어넘긴다.

A보다 두어 살 적은 B는 중견기업에서 과장으로 일할 때부터 골프를 익혔다. 동료들끼리는 물론 거래처와의 라운드가 잦았고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내기골프를 했다. 입문 초기 선배로부터 호되게 매운 맛을 본 A는 오기를 품고 잘 가르친다는 레슨프로를 찾아다니며 교습을 받았다. 가급적 회식자리를 피해 밤늦게라도 연습장을 찾아 땀을 흘렸다. 골프가 기술 못지않게 체력과 정신력의 비중이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쪽으로 경쟁력을 키우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A는 이날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 미스 샷이 많았지만 70대 후반의 스코어를 기록했다.

좋은 체격의 C는 B와 비슷한 또래로 만능선수로 불릴 정도로 스포츠라면 못하는 게 없었으나 골프채를 잡으면서 자신이 진정한 만능 스포츠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상적으로 레슨을 받고 연습도 열심히 했으나 결과는 늘 성이 차지 않았다. 마음속의 경쟁상대를 이기기 위해 칼을 열심히 갈면 그 칼날의 희생자는 경쟁자가 아닌 자신이 되기 일쑤였다. 입문 2~3년 차에 70대를 기록하며 평생 싱글골퍼로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한번 80대 중반으로 밀리더니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왕년의 싱글’이란 소리를 자주 듣는 C의 스코어는 80대 후반이었다.

C의 후배인 D는 골프를 늦게 배웠으나 골프의 재미에 쉽게 빠졌다. 개인사업을 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많아 일주일에 두세 번 씩 라운드를 해왔으나 기량 향상 속도는 더뎠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연습방법을 고집하는 그는 고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평소 술을 즐기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그는 내기 라운드에서 주머니가 털리면서도 다음 약속을 잡는다. 친구들은 늘 주머니가 털리면서도 이를 갈지 않고 다음 약속을 잡으며 술을 즐기는 그를 환영한다.
 

위에 예를 든 네 명은 골프라는 같은 스포츠를 익혔지만 수준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나이와 신체조건, 성격과 기질이 다르고, 운동신경의 발달 정도도 차이난다. 자신의 경쟁심 정도, 주변에서 얻는 자극의 정도, 좋은 레슨프로를 만나는 행운의 여부, 주변에 좋은 골프 길잡이가 있는지 여부, 골프에서 얻는 재미의 차이, 미스 샷이나 굿 샷을 받아들이는 태도, 평소 근력운동에 얼마나 충실한가 여부, 라운드 약속이 잡히면 여기에 맞춰 생체리듬을 조절할 줄 아는가 여부, 음주의 정도, 내기를 받아들이는 자세, 현재수준에 만족하는가 아니면 개선을 지향하는가, 나이에 따른 퇴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회사나 가정사의 상황, 골프장으로 오는 길에서 겪는 불쾌한 순간, 배정된 캐디를 만나는 순간의 느낌 등등 수많은 것들이 그물처럼 뒤얽혀 그 사람의 현재 골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천하의 타이거 우즈가 부활을 위해 몸부림치지만 컷 통과가 힘겨운 것이나, 잘나가던 LPGA투어의 스타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재기가 불가능해 보이던 선수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것, 이렇다 할 특장이 없으면서도 프로의 세계에서 퇴출되지 않고 장수하는 선수 등 골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스스로 쌓은 업(karma)에 따라 철저하게 연기의 그물 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그러면서도 이 불가사의한 연기는 스스로의 자세에 따라 새로운 인연과 조건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이 만들어갈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망망대해의 등대처럼 희망의 빛으로 다가온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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