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39)가 골프장갑을 벗었다.

물론 사회활동이나 취미활동의 일환으로 골프는 계속하겠지만 선수로서는 13일 인천 스카이72 골프코스에서 열린 LPGA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1라운드를 끝으로 프로생활을 마감했다.

골프선수로서 박세리가 이룬 위업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개인으로선 한국인 최초로 LPGA투어 통산상금 1000만 달러 돌파, 메이저 5승을 포함해 통산 25승 달성, 아시아인 최초로 명예의 전당 헌액 등 한국 여자골프사는 물론 LPGA 골프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박세리가 은퇴식이 열린 18번 홀을 향해 걸으면서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LPGA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제공


그러나 이 같은 개인적 성취는 그가 1998년 맨발의 투혼으로 US여자오픈을 우승함으로써 IMF의 어두운 터널에 갇혀있던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한국 여자골프가 LPGA투어의 절대강자로 군림하는데 기여한 공로에 비유할 바 못된다.

박세리를 빼고 오늘의 한국 여자골프를 논할 수 없다. 박세리의 25년 골프인생은 오늘의 한국 골프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겁 없이 미국 LPGA투어에 도전, 성공가도를 달리자 수많은 세리 키즈가 나타났고 이들이 속속 LPGA투어에 진출해 태극낭자 바람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어느새 세계 여자골프계를 쥐락펴락 하는 LPGA의 주류가 되었다.

한국 남자골프의 도약 역시 최경주의 역할이 주효했지만 이보다는 박세리와 세리키즈의 성공신화에서 촉발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은 박세리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다. 국가나 국민은 박세리를 통해 IMF의 터널을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찾았고 세리키즈는 박세리가 닦아놓은 길을 내달릴 수 있었다.

특히 세리키즈와 세리키즈의 키즈가 박세리에게 진 빚은 계량이 안될 만큼 엄청나다
▲박세리가 골프 꿈나무들의 손을 잡으며 은퇴식장에 들어서고 있다. LPGA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제공


공식 은퇴를 계기로 박세리가 각종 매체와 가진 인터뷰 내용을 보며 박세리의 골프인생이 그가 이룬 승리와 벌어들인 돈만큼 행복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오히려 골프에만 매달려온 자신을 후회하며 후배들에게 골프 외의 다른 세계와 만날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모습은 그가 화려한 성공 뒤에서 겪은 고통이 얼마나 절절했던가를 짐작케 한다.

그는 2004년부터 깊은 슬럼프에 빠진 뒤 2년 가까운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서 자각한 사실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했다고 한다.

그것은 골프채 하나로 꿈을 이뤘지만 골프를 빼고 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자각이었다.

미국 골프방송가에서 한때 박세리와는 긴 인터뷰가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돈 배경도 뒤늦게 알아챘다. 인터뷰 내용이 풍부하고 흥미를 끌려면 골프는 물론 다양한 세계에 대한 생각과 감정이 곁들여져야 하는데 그는 골프를 떠나서는 할 얘기가 없었다.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독서도 하고 LPGA의 다른 선수들처럼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겨야 인생경험도 풍부해지고 많은 얘깃거리가 나올 텐데 박세리에겐 골프밖에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골프를 하면서도 틈이 나면 수상스키나 낚시 등 다양한 취미를 즐기며 골프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다스릴 줄 안 안니카 소렌스탐과 카리 웹을 존경하는 것도 자신은 골프의 덫에 갇혀 사는데 그들은 골프를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 줄 알았기 때문이다.

박세리는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아픈 경험을 털어놓으며 자신을 아끼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고 한다. 여전히 골프 외에 좋아하는 것이 없는 후배들이 자신과 같은 아픈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박세리는 후배들에게 천금을 주고도 배우기 힘든 골프를 벗어난 삶의 지혜를 전해주는 선각자로 거듭 태어난 느낌이 든다.

승리를 쌓아가던 골프선수로서의 전성기 때보다, 리우 올림픽에서 여자골프 대표팀 단장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골프 꿈나무들을 지도하고 후배들에게 자신이 지나온 터널의 경험을 전해주는 것으로 더욱 행복감을 맛보는 것 같다.

골프선수로서는 장갑을 벗었지만 후배들에게 골프와 삶을 조화시키는 지혜를 전해주는 역할이야말로 박세리에게 어울리는 제2의 전성기 모습이 아닐까.  방민준(골프한국 칼럼니스트) news@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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