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한국] 골프광이 아니더라도 골프를 취미로 즐길 정도의 애호가들의 모임이라면 화제의 중심은 골프이기가 십상이다. 특히 라운드가 있는 날은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골프 외에 다른 화제가 끼어들 틈이 없다.
생면부지의 관계라 해도 진짜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면 바로 의기투합해 골프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때론 동지나 도반을 만난 듯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골프와 얽힌 대화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해외여행 중 비행기 옆 좌석의 사람과 짧은 대화를 나누다 취미가 골프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곤 십년지기를 만난 듯 공짜로 제공되는 각종 술을 마시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골프 얘기를 나눈 적도 있다. 

고인이 된 고우영 화백이 털어놓은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골프를 하고부터는 그동안 즐겨온 취미활동이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오데요.”
낚시 사냥 스킨스쿠버 등 다양한 취미활동에 빠져 지내던 그가 우연한 기회에 골프와 접해 재미를 붙이고 난 뒤의 변화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긴 설 연휴의 뒤끝에 골프께나 제법 친다는 친구끼리 한 차에 동승해 골프장으로 향했다. 티오프시간이 11시대라 아침 겸 점심을 골프장 입구의 자주 가던 식당에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식당에 도착해보니 주차된 차가 보이지 않았다. 명절 뒤끝이라 문을 열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확인 차 식당 문을 밀치니 닫혀 있진 않았다.

주방에 있던 주인아주머니가 우리를 알아보았으나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어쩌나? 아직 밥도 안 지었는데….”
“그럼 막걸리로 때우지요 뭐. 안주나 좀 주면 됩니다.”
일행 한 명이 이렇게 말하며 먼저 테이블을 차고앉았다.
“오늘 골프 손님이 없을 줄 알고 준비를 못했는데….”하고 잠깐 고민하더니 얼굴색이 밝아졌다.
“우리 아들 먹이려고 준비한 불고기 감이 있는데, 그럼 그것으로 막걸리 안주로 하세요.”
“우리야 좋지요.”
우리는 주인아주머니가 부엌에서 불고기를 준비하는 사이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고 잔까지 챙겨 요기를 겸한 술자리를 벌였다.
목줄기로 찬 막걸리가 타고 내려가자 속이 싸 했다.
“빈속에 마시는 막걸리도 추억 아닙니까?”
두어 순배가 돌았을 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불고기판이 테이블에 놓였다. 밥이 없어서 그렇지 안주로는 그만이었다.
“허허, 벌써 술기운이 오르니 오늘은 취타가 불가피하게 생겼네.”
“찬바람 속에 라운드 하려면 술로라도 몸을 덥혀 놓아야지.”
일행이 “아줌마도 아침 못하셨을 텐데 막걸리로라도 땜질을 하셔야죠.”하고 운을 떼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주머니가 의자를 옆 테이블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막걸리를 권하자 “맥주는 좀 마시지만 막걸리는 못 하는데…”하면서도 따라주는 막걸리로 입술을 적셨다.
“막걸리가 얼마나 좋은지 아직 모르시구먼. 하루에 한 병 정도 상복하면 위가 튼튼해지고 무엇보다 매일 아침 상쾌한 변을 볼 수 있어요.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면 그 이상 없어요.”
누군가의 막걸리 예찬에 마음이 동하는 듯 아주머니는 “나도 이제부터 막걸리에 맛을 들여야겠네요.”하며 양은 잔을 다시 들어올렸다. 
아주머니가 동석한 뒤 몇 순배 돌자 누군가 수작(?)을 걸었다.
“아줌마 얼굴을 보면 여전히 삭지 않은 욕망과 꿈이 꿈틀거리는 게 읽혀요.”
친구의 이 한 마디가 주인 아주머니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는지 금방 반응을 보였다.
“용하기도 하셔라. 그 말씀 들으니 술이 댕기네요.”
작은 양은 잔에 가득 따른 술을 비운 아주머니가 한 숨 돌리고 말을 이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산골에서 태어나 가부장 집안에서 부모와 오빠들에 짓눌려 그 꿈을 제대로 펼친 적이 없어요.”
이를 시작으로 1958년생 여인의 굴곡지고 한 많은 히스토리가 술술 풀려나왔다.

설 다음날 아들과 함께 먼저 간 남편을 모신 납골당에 들렀다 왔다는 아주머니는 충청도 산골의 훈장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엄격한 집안분위기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집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고 했다. 혼자 어디 나갔다 오면 오빠들의 손바닥에 얼굴이 성한 날이 없었고 어머니도 여자가 너무 많이 배우면 좋을 것 없다며 집안에 가둬 두려고만 했다고 한다.

공부도 하고 싶고 노래도 하고 싶고 운동도 하고 싶었던 그녀는 결국 고집을 부려 중학교에 진학, 학교대표 배구선수로 활약했다고 한다. 배구뿐만 아니라 육상, 배드민턴, 축구 등 스포츠는 거의 만능선수 수준이었고 당구에도 소질이 있어 쉽게 300을 쳤다고 했다. 특히 창이나 유행가는 물론 팝송에도 재미를 붙여 한때는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시골에서는 더 이상 꿈을 펼칠 수 없다고 판단한 아주머니는 단지 시골 탈출을 위해 처음 선본 남자를 따라 외지로 나왔으나 현실은 녹록치 않아 남편 먼저 보내고 외아들을 기둥 삼아 버텨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휴대폰에서 3년 전에 찍은 모습이라며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긴 머리에 영화배우를 방불케 하는 미모와 욕망이 이글거리는 표정은 거의 뇌쇄적이었다.  
“모처럼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너무 고마워요. 나 자신을 돌아보며 늦었지만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하며 살 계기가 된 것 같네요. 어릴 적 꿈은 못 이뤄도 당장의 꿈은 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주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하, 아주머니 얘기 듣다 보니 골프 할 생각도 없어졌네.”
“아예, 여기서 죽치고 아주머니 노래 좀 들어봅시다.”
“난 골프 하는 것보다 아주머니의 이야기 듣는 게 더 흥미진진한데!”

그러나 일행은 별 수 없이 아주머니를 남겨두고 골프장으로 향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그린이 얼어 라운드 하는 맛이 별로인 탓도 있었으나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들려준 개인 히스토리가 남긴 여운이 계속 남아 있었다.
라운드 당일 골프보다 더 나를 사로잡는 것도 있을 수 있음을 경험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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