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걸어가는 모습이다.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골프한국] 골프를 두고 ‘신사의 스포츠’라고 말하지만 골프처럼 초보자에게 모멸감과 자괴감을 안기는 운동도 찾기 힘들다. 

자신이 머리 올리던 날을 상상해보라.
주변 지인들의 권유로 한두 달 연습한 뒤 설레는 마음으로 골프장을 찾았으나 정신없이 라운드를 끝내고 골프장을 떠날 때의 허망함이란 말로 형언키 어렵다.
구력의 차이를 인정한다 해도 골프장에서 경력자와 초보자의 차이는 성인과 유아와 다를 바 없다.

남들은 드라이브샷을 빵빵 때려대고 아이언샷에서 찰싹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는데 자신은 방향과 비거리는 고사하고 공을 맞히는 것조차 어렵다.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룰을 숙지하지 못해 의도하지 않은 실수라도 하면 동반자들은 골프가 심판이 없는 유일한 스포츠임을 강조하며 지적질을 해댄다.

초반엔 머리 올리는 날임을 감안해 신입생 대하듯 친절하게 안내하지만 중반이 지나면 그냥 한 사람의 라운드 동반자로 거칠게 다룬다. 입으로 표현은 안 하지만 ‘연습을 어떻게 했길래 그 정도냐?’ ‘도대체 기본이 안 돼 있다’ ‘아직 필드에 나올 때가 안 된 것 같다’ ‘앞으로 우리와 라운드할 생각은 접어라’라는 등의 빈정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잠재력과 발전성을 인정받아 격려와 희망의 말을 듣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고 소수다. 

다른 한편으론 초보 시절 맛본 모멸감과 자괴감이 자신의 골프 수준을 높이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머리 올리던 날의 창피와 황당함 모멸감 등을 떠올리며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래 두고 봐라.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머리 올리던 날의 내가 아님을 증명해 보이겠다.’
‘실컷 경멸해라. 다음에 만났을 때 그대들이 내 앞에 무릎 꿇게 하고 말 것이다.’ 
머리 올리던 날 맛본 모멸감이 심할수록 연습 집중도가 높아지고 복수 성공 가능성도 높아질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와신상담을 가능케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자존감(自尊感)이다. 

머리 올리는 날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자존심이 상한다. 스스로 구력과 체력, 소질의 차이 등을 인정해 크게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면 골퍼로서 늘 푼수가 없다고 봐야 한다. 자존심이 심하게 짓밟힐수록 자존감을 되찾기 위한 반발력(反撥力)은 강해진다.

자신의 자존감을 되찾아가면서 비굴하지 않고 당당한 골퍼로 발전하고 동시에 남도 나처럼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남을 존경하고 배려하면서 자신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경기를 펼치는 단계로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초보 시절 때 ‘자존감의 골프’를 알았다면 구력 30~40년이 지나서까지 기본을 터득하기 위해 고생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감 넘친 걸음걸이와 퍼포먼스도 자존감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2021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한 시즌 최다 상금 신기록을 세운 박민지, KB금융 스타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장하나, LPGA 투어에서 활약하는 김효주 프로. 사진제공=KLPGA


직립보행(直立步行)이 인류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이듯 사람의 걸음걸이는 개인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걷기의 역사』라는 매력적인 책을 쓴 조지프 A. 아마토는 ‘걷기는 곧 말하기’라고 단정한다. 말하기가 인간 개체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듯 걸음걸이는 자기 나름의 방언과 관용구를 지닌 언어라는 것이다.
몸매와 눈빛, 얼굴 표정, 팔 다리의 움직임, 엉덩이와 어깨의 움직임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걸음걸이는 그 사람의 지위와 신분, 현재의 신체적 감성적 상태는 물론 앞으로 그에게 닥칠 운명의 정보까지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말에 걸음걸이를 표현하는 의태어(擬態語)가 유난히 풍부한 것은 그만큼 걸음걸이가 인간의 개체적 특징을 구분 짓는 중요한 행동임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비틀비틀. 흐느적흐느적, 비실비실, 비척비척, 휘청휘청, 휘적휘적, 기우뚱기우뚱, 건들건들, 흔들흔들, 아장아장, 어정어정, 어기적어기적, 성큼성큼, 살금살금, 타박타박, 터벅터벅, 뚜벅뚜벅, 사뿐사뿐, 살랑살랑 등은 걷는 주인공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중심을 못 잡고 건들거리는 걸음. 꼿꼿한 자세로 흔들림이 없는 걸음, 자신감 넘치는 걸음, 의기소침한 걸음, 쫓기는 걸음, 생활에 짓눌린 걸음, 깃털처럼 가벼운 걸음, 쑥스러운 걸음, 당당한 걸음, 불안에 찬 걸음, 희망과 기대에 찬 걸음 등을 그대로 드러낸다.
놀라운 것은 걸음걸이 주인공의 미래가 대부분 걸음걸이가 시사하는 대로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중계방송을 통해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선수들의 걸음걸이가 선수들의 골프 여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박세리, 양희영, 이미림, 장하나, 김세영, 신지애, 미아자토 아이, 안젤라 스탠포드, 리젯 살라스, 아리야 주타누간, 펑샨샨 등은 긴 여정에 어울리는 묵직한 걸음걸이로 골퍼의 길을 걸어왔거나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고진영, 리디아 고, 유소연, 이보미, 김하늘은 부담 없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골프 자체를 즐기는 스타일로 보인다.
박인비, 전인지, 박성현, 김효주, 전미정 등은 굳이 드러낼 게 뭐 있느냐는 담담한 자세로 자신의 생체·감성 리듬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다.

▲2021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KB금융 스타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장하나 프로(사진제공=KLPGA)와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제37회 신한동해오픈에서 우승한 서요섭 프로(사진제공=KPGA)


12일 끝난 2021시즌 KLPGA투어 네 번째 메이저대회인 KB금융 스타챔피언십에서 2위와 7타 차의 압도적 스코어 차이로 우승한 장하나(29)나 신한동해오픈에서 2위 조민규(33)에 1타 차 역전 우승을 거둔 서요섭(25)에게서 ‘자존(自尊)의 골프’를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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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방민준의 골프세상' 바로가기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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