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장을 가린 안개, 나무와 잔디, 벙커는 보이지 않지만 그 속에서 골퍼의 양심을 볼 수 있다.

라비에벨CC 박세원 필드가이드
마른땅을 촉촉이 적셔준 가을비가 내리고 나니 이제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가을의 날씨가 되었다. 이런 일교차 때문인지 요즘은 안개가 잦다. 새벽 출근을 하는 길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앞차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다들 비상등을 켠 채로 천천히 가고 있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 연일 이어지는 장맛비, 손끝이 얼듯 한 추위. 그중 최고는 아마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이지 않을까. 얼마 전 안개속 라운드 때 일이다. 1번홀 티잉그라운드에 오르자 안개만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며 투덜거리는 고객을 다독여 티샷에 들어간다. 이 와중에 스트로크내기를 하겠다는걸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모든 게 하얗게만 보이는 공간속에 빨간빛이 점멸하고 있다.

공략 지점을 표시해 놓은 안개등이다. 안개등을 기준으로 홀을 세세히 설명해 드리고 티샷을 시작하는데 중구난방으로 날아가는 볼들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세컨드 지점에 가보니 페어웨이에는 볼이 2개뿐이다. 왼쪽 카트도로 근처에 있는 볼은 비교적 빨리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꽤 많이 휜 듯 했던 볼이 아마 해저드에 빠진 것 같다. 일단 보이는 볼들의 거리와 방향을 잡아드리고 있는데, 혼자 오른쪽에서 해매시던 분이 화를 내신다. 언니는 공도 제대로 안 보고 무엇하고 있냐고……. 우측으로 많이 가셨다고, 해저드에 빠졌을 위험이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신다.

두 번째 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다. 역시 같은 고객의 볼이 우측으로 휘어간다. OB지역의 위험이 있으니 잠정구를 치고 가시라고 했지만, 드로 구질이라 괜찮을 거라고, 볼을 제대로 보는 거냐며 핀잔을 주신다. 하지만 역시 보이지 않는 볼. 세 분의 서브를 도와드리고, 우측으로 올라가 볼을 찾아본다. 러프와 잡초가 깊어 잘 보이지 않지만 앞 홀에서 마음이 많이 상하셨으니 열심히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마침 눈에 띄는 빨간 점이 3개 찍힌 Titleist 1번. ‘찾았다!’ 고객님을 부르려 고개를 드니 볼을 하나 떨어뜨려 놓고 계신다. 그리고 큰소리로 “여기 있다”며 당당히 말씀하시는 고객님. 그리고 다시 내게 왜 괜히 사람 불안하게 OB라고 하냐고 핀잔을 주신다. 어이가 없어 억울함에 울컥 했지만, 일단은 그냥 모르는 척 하며 다행이라고 기뻐해드린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나는 4홀 만에 녹초가 되어버렸다. 5번홀로 올라가니 짙던 안개가 희미해지는 듯하다. 머리 위로는 태양도 살짝 올라와있다. 걷히기 시작하니 금세 사라지는 안개가 너무나 고맙다. 고객들도 이제 얼굴에 화색이 돈다. 드로 구질이라던 고객의 볼은 연신 슬라이스다.

안개가 없으니 잘 안 맞는다며 18홀 내내 투덜거리던 고객에게 배웅인사를 하며 2번홀에서 찾았던 OB볼을 조용히 손에 쥐어 드렸다. 골프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걸, 보이지 않는 양심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묻어두어선 안 된다는 걸 언젠간 깨닫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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