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골프 모임에서 만나는 친구들을 보면 나의 10대를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창밖에 굵은 빗줄기가 빗금을 그리며 그칠 줄 모르고 날아가고 있다.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가고 있지만 20층 꼭대기에 있는 내 방에선 정지된 그림처럼 비 풍경이다.

어떤 시인이 그의 시에서 “그리운 미친년…”이란 표현을 썼다하여 뭇매를 맞았던 여름에 그 “미친 비”가 20여 일 동안 쉬지 않고 쏟아졌다. 이건 “미친 비”라 욕을 해도 마땅하다. 세상에 이런 장마는 처음 본다. 그런데도 동쪽에는 폭우에 산이 무너지고 남쪽에는 폭염이다. 7월에 잡혀있던 골프 모임이 중순까지만 해도 다섯 개 째 무산되었다. 앞으로 두서너 개도 불안하다. 결국 7월의 골프는 전무라고 봐야할 모양이다. 처음엔 하루치 골프 비용을 쓰지 않아 거액의 돈이 굳어서 좋고 라운드에 쓸 시간을 다른 일에 활용할 수 있어서 횡재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골프를 왜 하면서 얽매여왔었나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는 기회가 되었다.

골프 라운드란 일단 필드에 나가면 행복한 줄 알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골퍼들은 심신이 모두 시달려야한다. 비기너 골퍼일 때엔 라운드 며칠 전 부터 늦지 않도록 준비를 단단히 해야지 또 이것저것 많은 준비물을 챙겨야지 몇 번 스윙도 해보고 가야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장년이 된 골프 고수라도 라운드 준비는 갈 때마다 신경 쓰이는 일이다. 게다가 요즘은 지갑 속에 현금이 넉넉지 않을 경우가 있어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하찮은 것 같은 재난을 심심치 않게 만나는 게 골퍼들의 걱정거리다. 그래도 돈으로 해결되는 건 간단한 문제다. 갑자기 이가 아프다 어깨나 허리에 통증이 자고나니 생겼다든가 하면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장마에 무산된 골프 모임 중에서 진정으로 다른 모임은 횡재 수준으로 반가울 수도 있었지만 진정으로 아쉬운 모임이 한두 개 있었다.

300회 가까이 이어져 온 고등학교 동기동창모임이다. 처음엔 계절에 한번 씩 모이다가, 몇 년 전 부터는 매달 모인다. 가끔 졸업 30주년, 또는 개교60주년 기념이라든지 구실을 붙여 더 모이기도 한다. 마음 한 구석엔 열심히 모여 봐야 얼마나 더 만날 수 있겠냐는 슬픔도 있다. 처음 시작할 땐 시큰둥한 모임이었고 마지못해 나가는 생각들이었지만 얼마 전 부터는 200회를 채울 수 있도록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인생을 잘 살아보자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10대 시절에 만나 고교를 졸업하면서 각기 진학하고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꾸리고 열심히 일하며 틈틈이 골프 실력을 다듬어 왔다는 게 얼마나 신통한 일인가.

그러다가 골프 할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친구도 소중하단 생각이 들만큼 인생을 살아온 나이가 되었다. 직업도 가지가지 나이든 모습도 다 다르지만 한 가지 골프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처음엔 다른 골프 모임에 비해 재미도 없고 별로 반갑지도 않은 얼굴들이어서 의무감 같은 의식으로 참가해왔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내 인생의 보물이 있다면 내가 걸어오며 이뤄 놓은 개인적인 결실과 자식들이고 다음으로 지난날의 소중한 기억들이다.

가물가물 지워져가고 아주 잊혀진 기억들을 애써서 되살려보곤 하는데 고교동창 골프 모임에 가면 애쓰며 되살리지 않아도 지난날의 기억들이 통째로 살아나와 나를 행복하게 한다. 교실 한 구석에서 있었던 일이 느닷없이 떠오를 때도 있다. 실없이 혼자서 웃으며 필드를 걷는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10대를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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