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라는 브리티시오픈 우승으로 투어 16승째를 기록했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자격을 획득했다.
오메라가 1998년 마스터스 우승을 확정짓는 버디 퍼팅을 성공한 후 기뻐하고 있다.
1979년 US아마추어에 참가한 스물두 살의 풋풋한 오메라. 그는 결승전에서 존 쿡에게 승리를 거뒀다.
다시 만나 기쁨을 나누는 두 사람. 타이거와 오메라는 올해 마스터스에서 연습 라운드를 두 차례 같이 했다.
여러 해 동안 동료들이 골프 명예의 전당에 속속 입성하는 걸 보며 마음고생을 해온 마크 오메라. 그가 마침내 세인트 오거스틴에 가게 됐다. 석 달 사이에, 그것도 마흔한 살에 메이저 2승을 달성한 바 있는 오메라는 자신의 입회 자격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더컵 주장의 영예를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마음이 풀리지 않은 눈치였다.


당시 마흔한 살이던 마크 오메라가 석 달 사이에 메이저 2승을 차지하며 골프계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이 벌써 17년 전의 일이다. 1998년 마스터스와 브리티시오픈을 석권한 오메라는 그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면서 세계 랭킹이 2위까지 치솟았고,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확실한 자리를 예약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는데, 세인트 오거스틴에서는 좀처럼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런 푸대접이 본격적으로 쓰라리기 시작한 건 프레드 커플스(메이저 1승)와 콜린 몽고메리(메이저 무승)가 전당에 입성한 2013년부터였다.

투어 16승(정규 투어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우승을 차지한 대회는 브리티시오픈)의 오메라는 어리둥절했다. 아니, 나는 왜 빼놓는 거야? 그러다 작년 가을에 전화벨이 울렸다.

오메라의 명예의 전당 헌액이 결정됐다. 그는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이번 달에 올드 코스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세인트 앤드루스대학에서 공식적인 입회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2015년에 오메라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동기는 로라 데이비스, 데이비드 그래엄, 그리고 고 A.W 틸링해스트 등이다. <골프매거진>은 올해 쉰여덟이 된 오메라를 휴스턴에 있는 그의 집으로 찾아가 만났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선수생활 후반의 맹활약, 간헐적으로 이어진 타이거 우즈와의 우정, 그리고 미국 PGA의 홀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명예의 전당 입회 명단에서 제외됐었는데, 마침내 들어가게 됐다.
골프계의 위대한 선수들 가운데 서게 됐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프로 골퍼 생활 35년째인데, ‘메이저에서 우승하지 못한 최고의 선수’ 명단에 올랐던 때가 기억난다. 그러다가 마침내 마흔한 살이던 1998년에 마지막 두 홀에서 버디를 하며 마스터스 우승을 차지했고, 같은 해에 연이어 브리티시오픈까지 차지하는 도약을 이뤘다. 그리고 마침내 전화가 왔을 때는 너무 기쁘고 흥분됐다.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 행복한 건 물론이었지만 약간의 슬픔도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이 순간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마스터스 우승과 함께 유러피언 투어 29승을 기록한 이안 우스남이 마크 오메라보다 먼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가.
나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솔직한 의견 표출은 존중한다. 하지만 내 경력을 우스남과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그는 US아마추어에서 우승을 하지 못했다.

나는 브리티시오픈에서 우승했는데 그는 그러지 못했다. 간발의 차이다. 내가 미국 투어에서 기록한 승수보다 그가 유러피언 투어에서 올린 승수가 더 많다. 하지만 15~20년 전의 유럽은 PGA 투어만큼 어렵지 않았다. 이건 유럽이나 이안을 무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이안을 좋아한다. 그는 매우 뛰어난 선수이고, 나와도 절친한 친구다. 시대나 선수의 경력을 판단하는 건 늘 쉽지 않을 것이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레이먼드 플로이드는 2013년 <골프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명예의 전당 입성 기준이 낮아졌다”면서 “자격이 없는데도 투표를 거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나.
일부 동의하지만 요즘은 뛰어난 선수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15~16승, 18승을 하면서 메이저 2승을 거두는 선수가 드물어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몇 승을 거두거나 메이저에서 몇 번 우승해야 한다는 기준이 있더라도, 그걸 고정불변의 원칙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지금처럼 명예의 전당 회원들이 선정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게 옳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선수의 인기에 따라 명예의 전당 입성 기준을 삼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사실에 집중할 것이다.


기록이 뒤처진다고 볼 수도 있는 커플스나 몽고메리가 먼저 들어갔을 때 속상하지 않았나.
솔직히 실망스러웠지만 살면서 더 실망스러운 경험은 많았다. 라이더컵의 주장을 한 번도 맡지 못한 것도 그렇다. 특히 아일랜드에서 대회가 열린 2006년에는 내가 그 자리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미국 PGA에 알려줘야겠다고 느꼈다. 게다가 톰 레먼이 나를 제치고 주장을 맡았다. 아무래도 PGA는 내가 라이더컵 주장을 맡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1999년 라이더컵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출전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일단 그것과 관련해서 오해를 유발하는 정보가 상당히 많았다. 나는 당시 미국 PGA의 최고경영자였던 짐 오트리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뒤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당신에게 이 말만 하고 싶어요. 나는 라이더컵에 선수로 여러 번 출전했습니다. 선수들에게 출전료를 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요. 선수들이 돈을 받을 자격이 있다거나 돈을 줄 필요가 있다는 게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이 대회에서 엄청난 수익이 창출된다면, 실제로 그 돈은 어디에 쓰이는 겁니까?” 라이더컵 팀에 합류한다고 해서 돈을 받아야겠다는 취지가 아니었다. 나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도 상관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한 말이 옳았다고 믿는다. 프로 골퍼라는 건 그 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대회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보상을 받는데, 프로 골퍼들만은 예외라는 게 그냥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짐에게 말했다. “문제가 되기 전에 이 일을 처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말했을 때만 해도 문제는 별로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맞다. 그러다가 1999년에 PGA챔피언십이 열린 메디나에서 대규모 회의가 열렸다. 모든 선수들이 참가했고, 라이더컵 주장이었던 벤 크렌쇼와 투어 커미셔너인 팀 핀첨, 그리고 짐 오트리도 참석했다.

그리고 모욕적인 얘기를 많이 들었다. PGA에서 나는 메이저 2승을 기록한 선수였다. PGA 투어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였고, 미국 PGA가 선정한 올해의 미국 선수이기도 했다. 그런데 메디나에서 그들은 내가 느끼기에 지명도가 훨씬 떨어지는 선수들과 나를 동급으로 취급했다. 지금은 내가 거물도 아니고 인기 선수도 아니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메이저 2승을 했는데, 다른 메이저 챔피언십 우승자나 PGA 투어의 몇 승 달성자와 같은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건 모욕적이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내가 끝내 라이더컵 주장으로 선정되지 못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출전료를 받지 않으면 플레이를 하지 않을 선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그걸 ‘플레이에 대한 보상’ 논쟁으로 포장했지만, 그게 꼭 본질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석 달 사이에 메이저 2승을 차지했던 1998년의 마법 같았던 여름으로 돌아가 보자. 질문은 간단하다. 어떻게 된 건가.
어쩌면 다른 누구보다 내가 더 놀랐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오거스타 내셔널의 느낌을 매우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주에 나는 샷을 썩 잘하지 못했고, 퍼팅도 썩 좋지 못했다.

자신감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나를 포함해서, 아무도 내가 마스터스의 우승권에 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 내내 퍼팅에 대한 감각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흔두 번째 홀의 측면 경사진 라이에서 6미터짜리 까다로운 퍼팅을 성공하며 그린 재킷을 손에 넣었다.
그게 들어갔을 때 너무 놀랐고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윽고 마스터스의 우승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주에 내가 샷을 대단히 잘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다 통계를 확인해보니 참가 선수들 중에 내 퍼팅 횟수가 가장 적었다. 그런데도 퍼팅의 느낌이 별로였으니, 이상한 노릇이었다. 아무튼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려면 퍼팅을 잘해야 한다.


버크데일에서 열린 브리티시오픈에서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대회 마지막날 파5 17번홀의 그린에 서 있을 때 내 스코어는 1오버파였다. 그리고 그때 저스틴 로즈가 웨지샷을 그대로 홀인시키면서 18번홀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내 앞에서도 함성이 들렸는데, 타이거가 마지막 다섯 홀 가운데 버디를 3개 기록하면서 1오버파(66타)로 대회를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내 뒤에서는 선두인 브라이언 와츠가 16번홀에서 보기를 하는 바람에 이븐파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17번홀에서 4.2미터 버디 퍼팅을 앞둔 상태였다. 라인을 읽고 볼 앞에 섰을 때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타이거가 지금 지켜보고 있을 거야. 우리가 홈 코스에서 플레이를 할 때마다 이런 퍼팅으로 그를 이겼었지. 이번에도 이 퍼팅을 성공시키면 타이거가 약이 좀 오를 거야.’


두 번째 메이저 우승에 대한 생각을 한 게 아니라 타이거의 약을 올릴 생각을 했단 말인가.
대회 진행 상황과는 아무 상관없는 생각만 했다(웃음). 그 퍼팅을 성공하고 마지막 홀에서는 파세이브를 했다. 2온을 한 다음 첫 번째 퍼팅은 홀 왼쪽으로 1.2미터 벗어났다. 그걸 성공한 후, 연장전에서 브라이언을 상대로 우승을 거뒀다.

그런데 다음 날 타이거가 이런 얘기를 했던 게 기억난다. “18번홀에서 그 퍼팅이 왼쪽으로 1.2미터나 짧았다니, 믿을 수 없어요.” 그래서 말했다. “17번홀에서 내 머릿속에 온통 네가 지켜본다는 생각뿐이었고, 그걸 성공하면 네가 약이 오를 거라고 생각했다는 게 더 믿을 수 없을 걸!”


타이거와의 재미있었던 일화 하나를 들려준다면.
너무 많은데 가장 재미있었던 건 1998년, 버크데일에서 내가 우승한 직후의 일이다. 그 당시도 그렇고, 오랫동안 나는 핑의 앤서2로 퍼팅을 했다. 그 클럽을 정말 좋아했다. 믿음직한 퍼터였다. 타이거는 늘 내 퍼터를 사용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걸로 퍼팅을 할 때마다, 그린의 어느 지점에서 시도를 하든 늘 성공했다. 우리는 희한하다며 웃곤 했다. 그는 그걸 가지고 싶어 했지만 내가 말했다.

“줄 수 없어. 내가 사용해야 하니까. 하지만 내 예비 퍼터를 사용하게 해줄게. 그것도 이 퍼터랑 거의 똑같아.” 그렇게 해서 타이거가 내 예비 퍼터로 두세 달 정도 퍼팅을 했다. 버크데일에서 대회를 마친 후 나는 타이거의 전세기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그는 자신이 한 타 차로 연장전에 나가지 못한 게 너무 속상하다면서 그 이유를 웃으며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의 코를 눌러줄 수 있었는데.”

나는 클라레 저그를 꺼내보자고 말했다. 그가 컵을 양손으로 들었을 때 내가 말했다. “타이거, 내가 두 가지만 말할게. 먼저 이 클라레 저그? 네 이름은 이 트로피에 한 번 이상 새겨질 거야. 그래도 최소한 내 이름이 너보다 앞에 놓이게 됐지.” 그러자 그가 물었다. “두 번째 얘기는 뭔데요?” 그래서 내가 말했다. “네가 사용한 핑 앤서2 퍼터 있지? 왜 그게 예비용이라고 생각해? 왜냐면 그건 늘 한 타가 모자라거든.” 올랜도에 착륙한 후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핑 앤서2를 꺼내 내 가방에 집어넣었고 두 번 다시 그걸 사용하지 않았다(웃음).


요즘은 타이거와 더 이상 자주 만나지 않는다고 말했던데, 사이가 멀어졌나.
그의 추문이 터지기 직전이니까 한 5~6년쯤 됐다 나는 챔피언스 투어로 옮겨갔고, 안타깝게도 이혼을 하고 힘든 시기를 겪었다. 인생의 갈피를 놓쳐버린 심정이었다. 그러다가 현재의 아내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휴스턴에서 살게 됐다. 그 이후 타이거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이메일도 보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당시에 그는 그야말로 레이더망에서 사라졌었다.


타이거가 보고 싶은가.
그렇다. 함께 어울렸던 시절이 그립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달라졌다. 예전 같지 않다. 그래도 내가 늘 그를 응원한다는 걸 타이거는 알고 있다. 나는 요즘도 가끔 한 번씩 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나는 그 친구를 사랑한다.


둘 사이를 여전히 친구라고 생각하나.
그렇다. 지금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거나 뭔가를 부탁하면 그는 나를 도와줄 거라 믿는다.


타이거는 다시 건강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고, 올해 마스터스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좋은 플레이를 펼쳤다. 그가 잭의 메이저 18승 기록을 뛰어넘을 거라고 생각하나.
대답하기 정말 어렵다. 그는 뭔가 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으면 더 자극을 받고 결국 해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세월이 흘러가는 걸 보니 모르겠다. 나는 지금껏 타이거 우즈의 반대편에 선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메이저 5승을 더해서 잭의 기록을 뛰어넘는 일이 일어날 지는 잘 모르겠다.


타이거와 함께 모두 행크 해니를 코치로 뒀었다. 해니가 <빅 미스>라는 책에서 타이거에 대한 모든 것을 밝혔을 때, 사이가 조금 어색하지는 않았나.
조금은 그런 면이 있었다. 두 사람을 연결해준 장본인이 나였기 때문이다. 행크는 훌륭한 코치이다. 나는 행크가 타이거를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타이거가 행크의 지도를 받는 동안 스윙이 최고조에 도달한, 골프 역사상 그 누구 못지않은 스윙 실력을 발휘했던 시점이 있었다. 그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나는 중간에 끼었다. 그건 이별과 같고, 나는 해니를 탓하지 않는다. 다만 나였다면 그런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해니와의 관계는 어떤가.
좋다. 가끔 한 번씩 만난다. 내가 선수로 성공하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훌륭한 코치다. 그가 앞으로도 잘 되길 바란다.


하루만 골프계의 황제가 된다고 가정해보자. 처음으로 명령하고 싶은 건 뭔가.
오래 전부터 지적해온 골프계의 가장 큰 문제는 플레이 속도다. 터무니없는 수준이다. 나는 3년 동안 투어의 정책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때 커미셔너에게 말했다. “정말 거슬린다. 플레이 속도가 너무 느리다.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상태인데, 투어의 규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더 강한 벌칙을 가해야 한다. 사람들을 변하게 만들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정말 코미디 같다. 플레이를 더 빨리 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골프에서 배운 인생의 지혜라면 어떤 게 있나.
행동과 처신, 품행과 인격, 삶의 모든 중요한 가치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실력을 쌓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믿음직스러움이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뛰어난 선수가 되려면 성실함이 필요하다. 이런 모든 것들이 더 좋은 사람을 만들어준다. 삶에 대해 골프만큼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스포츠도 없다.


자신의 선수생활을 돌이켜볼 때, 잠재력을 초과달성한 것 같은가, 아니면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다. 두려움, 앞날에 대한 불확실함이 가장 큰 동기였고, 그렇기 때문에 늘 자신을 채찍질하려고 노력했다. 지금도 늘 발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잠재력에 미치지 못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초과달성한 것도 아니다. 그 중간, 스위트스폿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결코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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