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매경오픈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 늦깎이 골퍼 문경준을 만났다. 과거 9년 동안의 설움을 말끔히 씻어낸 프로 10년차의 그는 올 시즌 KPGA 코리안 투어에서 가장 빛나는 선수 중 하나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매경오픈 우승 후 가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인내의 과정이 고될수록 열매의 당도 또한 더욱 높아진다. 뒤늦은 종목 전향(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테니스 선수였다), 금전적 어려움, 공황장애 등을 극복한 인내의 열매는 상금 2억원의 매경오픈 우승이었다. 데뷔 10년만의 첫 우승을 ‘메이저급 대회’에서 장식한 문경준(33, 휴셈) 이야기다.

그는 공황장애를 극복하고 군 복무를 마친 2012년부터 상금 랭킹을 꾸준히 상승시켰고 지난해 상금 랭킹 7위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골프팬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올해에는 처음으로 일본 JGTO 출전권까지 얻어 2개 투어를 병행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지난 5월 GS칼텍스-매경오픈에서 우승하며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다.

문경준은 첫 일본 투어 병행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면서도 “무엇보다 자신과 같이 운동을 늦게 시작하거나, 어려운 환경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는 선수들에게 희망이 된 것 같아 우승하길 참 잘했다”고 말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그는 모든 것을 깨우친 것처럼 편안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스폰서에 대한 감사와 공황장애를 극복한 힘에 대해 이야기했고, 후배 선수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다.


최근 한국, 일본, 태국을 오가는 살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데,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정말 빡빡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대회에 많이 출전하는 걸 꿈꿔왔는데 지금은 어떻게 출전 스케줄을 관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행복한 고민이라는 것이다.

우승한 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매경오픈의 우승 상금이 꽤 많아서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나는 오로지 상금으로 생활하는 생계형 골퍼다. 그래서 대회 성적에 따라 생활하는 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가족들이 전보다 편안해진 상황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생계형 골퍼? 그렇다면 8년 동안의 길고 긴 무명 시절에는 어떻게 투어 생활을 연명했나. 중간에 군 복무까지 했는데.
어릴 때 우리 집은 한마디로 ‘잘 사는 집’이었다. 하지만 과거 IMF 사태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면서 집안 형편이 완전히 기울었다. 그 이후로는 투어 경비를 대회 상금과 소정의 용품사 계약금으로 충당해야 했다. 모든 면에서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었다. 프로골프투어의 특성상 전국을 누비고 다니는 데다가 운동선수니까 몸에 좋은 음식도 잘 챙겨 먹어야 하고, 플레이에 도움이 되는 트레이닝 등을 해야 하니 정말 빠듯하게 지냈다.

지난해 상금 랭킹 톱10에 들면서 가능성을 보였고, 드디어 스폰서가 생겼다.
함께 운동했던 선배가 휴셈 이철호 대표에게 “힘들게 운동하는 친구가 있는데 조금만 지원이 있으면 잘할 것 같다”며 나를 소개해줬다. 휴셈 이 대표는 내게 정말 은인이다. 생활비 걱정 없이 도와줄 테니 대회 상금으로 투어 경비를 충당하라며 많은 용기를 줬다. 일단 돈 걱정 없이 대회에 참가할 수 있어서 부담감이 줄었고, 지원군이 생긴 덕분에 성적도 점점 좋아지며 자신감이 붙었다.

10년만의 생애 첫 우승을 매경오픈이라는 큰 대회에서 장식했다. 대업을 달성한 건데.
지난해를 포함해서 그동안 우승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번번이 실패했었다. 우승의 기쁨도 기쁨이지만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치고 우승을 차지해 더욱 뿌듯했다. 개인적으로 남서울 컨트리클럽에서의 성적이 특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합 전에 열 번 정도 남서울 컨트리클럽에서 라운드를 할 수 있었다. 3월부터 매경오픈 전까지 시간만 나면 남서울에서 실전 연습을 했다. 이렇게 준비를 철저히 해서 결과가 좋게 난 것 같다. 준비 과정이 성공적이었던 건 전적으로 스폰서 기업인 휴셈의 이철호 대표의 도움 덕분이다. 남서울은 그린피가 비싸고 부킹도 매우 어려운 골프장인데, 이 대표가 남서울 회원이어서 매우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우승은 이미 예견돼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마지막 라운드에 우승권에서 플레이하면 어떤 기분인가.
스스로 기대를 많이 할 수밖에 없고, 3라운드를 마친 저녁에는 특히 주변에서 연락이 굉장히 많이 온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프로 대회 우승이라는 건 일생일대의 기회니까. 많은 생각이 오가면서 긴장도 된다. 이번 우승 때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1타 뒤진 2위로 시작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반대로 선두였던 제이슨 노리스가 부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더 자신감을 가졌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겪은 공황장애가 미친 영향은 뭐였나.
골프 때문에 공황장애가 왔다. 학창시절 테니스를 그만두고 골프로 전향하면서 골프 시작 4년 만에 정규 투어에 데뷔했다. 프로 대회에서도 데뷔하자마자 컷 통과를 하고 성적을 내면서 골프가 쉽게 느껴졌다. 그런데 2007년 대회 메리츠 솔모로오픈에서 4라운드 후반까지 선두를 달리다가 14번홀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우승 기회를 하찮은 실수로 놓치고많은 충격을 받았다. 그때의 충격 이후 골프를 쉴 때, 운전을 할 때, 밥 먹을 때도 온통 대회 성적의 압박감 속에 살았다. 그러더니 2008년에 어느 날에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쓰러질 것 같더라.

가장 많이 도움을 준 사람은 누구였으며 어떻게 극복해냈는가.
아내다. 압박감에 시달려 집안으로 숨으려고만 하는 나를 밖으로 이끌어주고 좋은 얘기를 많이 해줬다. 기쁨과 고민을 언제나 함께 나눴다. 아내 덕분에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2009년에 코리안 투어에서 군입대자들의 시드를 유예해주는 규정이 생겨 바로 입대했다. 공익근무를 하면서 골프채를 손에서 놨기 때문에 일단은 스트레스가 줄었다. 또 공익근무를 할 때 항상 새벽 5시에 출근해서 골프 중계를 보곤 했다. 화면을 통해서도 필 미켈슨을 비롯한 세계적인 선수들이 압박감을 느끼고 흥분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들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루틴을 일정하게 가져가곤 했는데, 때로는 실수도 하더라. 그걸 보고 ‘저 선수들도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많은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공황장애를 완전히 떨쳐내기 위해 명상을 했고 등산도 많이 했다. 지금도 가끔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지만 이제는 그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마인드 컨트롤 할 수 있다.


결혼은 언제 했나. 가족의 존재가 생계형 골퍼들에게는 아주 많은 힘이 된다고 익히 알려져 있다.
결혼은 2011년 11월11일에 했고, 세 살배기 아들 지호가 있다. 가정을 꾸리기 전에는 몸이 힘들거나 코스가 맘에 들지 않아 플레이가 잘 풀리지 않으면 부정적인 생각을 참 많이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어느 코스를 가든,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끝까지 해결하려는 마음이 강해졌다.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마음가짐이 자동으로 생긴 것 같다. 그리고 금융업에 종사하는 아내 덕분에 금전적으로 많은 도움이 됐다. 상금으로는 투어 경비만 충당하기에도 부족하니 직장에서 돈 벌면서 뒷바라지를 했다.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

일본 투어 병행은 처음인데 할 만한가.
보통 체력이 아니면 안 된다. 육체적으로 힘들다. 일본에서는 큐스쿨 플레이어라고 하는데. 모든 대회에 출전 자격이 있는 건 아니고 상반기 8~10개 대회에 출전한 성적으로 후반 참가 대회 수가 결정된다. 어쨌든 골프의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보다는 다소 앞서 있는 무대이기 때문에 배울 점이 많다. 내가 어느 정도 위치인지 느낄 수 있고,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 베테랑 선수들의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쇼트게임 스킬이나 어려운 트러블 상황에서도 나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등이 그렇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다보니 한국에서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긴다.

지난해 연말 KPGA 대상 시상식에서 ‘해피투게더 상’을 수상했다. 이 특별한 상을 수상한 사연은.
예전에 남영우 선배와 라운드를 한 적이 있는데, 선배가 라운드 중 계속 쓰레기를 줍더라. 우리 같으면 눈에 보이는 큰 쓰레기가 아닌 이상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인 것이 사실이다. 당시에는 선배가 솔선수범하는데 후배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나도 덩달아 주웠다. 그런데 코스에 담배꽁초가 생각보다 너무 많더라. 그래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내가 꽁초를 주우면 동료 후배 선수들이 함부로 버리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레이크힐스용인과 스카이72에서 마샬을 했었다. 그러나 골프장에 대한 애착이 꽤 있는 편이어서 지속적으로 꽁초를 주웠다. 그리고 최근 남자 투어의 흥행에는 변화의 필요성이 강조됐는데, 그때 내 작은 실천이 의외로 크게 부각되면서 협회에서 챙겨준 상 같다. 감사하고 영광스러울 따름이다.

올 시즌 목표와 선수 생활 최대 목표는.
일생일대의 큰일을 해냈지만 너무 동요하지 않고 지금 내가 하는 방식이 옳다는 믿음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승, 상금왕 등의 구체적인 목표는 없다. 그냥 50세의 시니어 투어 플레이어가 돼서도 상금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꾸준히 롱런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가족들과 여행도 다니면서 여유로운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별한 논문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어떤 내용인가.
평범한 선수도 엘리트 선수를 이길 수 있다는 내용으로 구성하고 있다. 많은 스포츠 종목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굳이 어릴 때부터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없을지언정 우승의 기쁨은 누릴 수 있다. 특히 골프는 정적이고 심리적인 부분이 많이 차지하는 운동이라 더 그렇다. 나름대로 조사도 해보고 하니 롱런하는 선수들은 오히려 늦게, 시작하고 힘들게 운동한 경우가 많더라. 롤모델인 최경주, 김형성 선배도 그렇고 양용은 선배도 그렇다. 또 한국 골프의 전설 최상호 선배도 그렇다. 존경하는 선배들의 케이스도 많고, 또 나름대로 최고수가 되려면 어떤게 중요한지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럼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요소는 뭔가.
근성, 신체, 물질(돈) 세 가지다. 이 세 가지가 다 조화롭게 맞으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 근데 그 중 하나라도 결격사유가 있으면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근성이 있고 신체조건도 좋은 선수인데 돈이 없어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성장 속도가 더디다. 또 타고난 신체와 부유한 집안의 지원이 있는 선수인데 근성이 부족하다면? 빠르게 재능을 꽃피웠다가 금방 그 꽃이 질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된 사례들을 바탕으로 데이터를 만들고 그래프로 척도를 만들어보고 있다. 정말 재미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려는 후배 선수들, 늦깎이 선수들에게 조언 한마디.
운동을 늦게 시작하거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운동하는 선수들도 충분히 엘리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어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는데, 자신의 위치에 대해 자책하는 선수들이 꽤 많다. 재능과 근성이 있는데 집안이 어려워서 투어 데뷔를 포기하는 친구들도 많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없다. 나도 해냈다. 참고 또 참다보면 여건이 점점 나아질 것이고 재능이 나타날 것이다. 내가 확실히 경험한 일이니까 자신 있게 후배들한테 얘기해줄 수 있다. 무엇보다 이번 매경오픈 우승으로 어렵게 운동하는 선수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서 ‘우승하길 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다시 태어나도 골프 선수를 하겠는가.
골프는 확실히 정신적으로 힘든 운동이다. 생각 좀 해봐야겠다(웃음).


문경준 Profile
생년월일: 1982년 8월26일
신장: 182cm
프로데뷔: 2007년
주요기록
2014 야마하-한국경제 KPGA 선수권 2위
2014 KPGA 코리안 투어 신한동해오픈 2위
2015 KPGA 코리안 투어 GS칼텍스 매경오픈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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