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미국 뉴욕주 머매러넥의 윙드풋 골프클럽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대회 제120회 US오픈 우승을 차지한 브라이슨 디섐보가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골프한국] "깃발이 어디에 꽂혀 있지?"

미국 뉴욕주 머매러넥의 윙드풋 골프클럽(파70·7,459야드)의 14번 홀(파4·444야드)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선 브라이슨 디섐보가 캐디 팀 터커에게 물었다. 
이미 필요한 웬만한 정보를 꿰뚫고 있고 2타 앞서 라운드를 시작했던 경쟁자 매슈 울프(21)는 3타나 뒤져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그린 앞에서 12피트, 왼쪽에서 4피트 지점."
디섐보는 자신의 야디지북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캐디에게 재확인한 것이다.

그는 나흘간 56번 드라이버를 잡았으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3개만 페어웨이를 지켰고, 마지막 라운드에선 14번 드라이버를 잡고 6번 밖에 페어웨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는 굳이 드라이버를 잡지 않아도 됐지만 자신의 골프 스타일을 유지하고 싶었다.

디섐보는 드라이버를 빼 바람을 뚫고 296야드를 날렸다. 공은 페어웨이에 떨어졌다. 버디를 놓쳐 파 세이브에 만족했지만 매슈 울프는 함께 드라이버를 잡았다가 러프에 들어갔다 나오며 보기를 범했다. 

"모두들 페어웨이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이야기하는데 이 코스에선 그게 핵심이 아니다. 페어웨이 지키는 것보다 홀의 어느 쪽에 공을 올려놓느냐, 그리고 6번 아이언 대신 웨지를 잡을 수 있게 얼마나 공을 멀리 치느냐가 관건이었다."

최종합계 4오버파로 단독 5위에 오른 잰더 쇼플리(27)가 라운드 후 밝힌 소감이 디섐보의 우승을 설명해준다.

디섐보는 러프에 공이 묻혀도 가공할 파워 덕분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비거리로 웨지를 잡을 기회를 많이 만들어냈다.

그에겐 '필드의 철학자(philosopher on the field)' '골프 머신(golf machine)'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텍사스주 댈러스의 SMU(서던 메도디스트 대학교: 남부감리교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필드에서도 물리학도 철학도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과학적인 접근과 통계, 확률에 의한 결과를 바탕으로 직접 실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골프 머신'이란 별명이 붙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그는 대학시절 개인코치를 둘 형편이 못돼 호머 켈리(Homer Kelley, 1907~1983)라는 사람이 쓴 'The Golfing Machine'이란 교본을 읽으며 스윙을 터득했다.

이 책의 저자는 시애틀 보잉사의 엔지니어로, 34세에 골프를 시작했으나 스윙이 뜻대로 되지 않자 자신을 가르치던 티칭프로에게 스윙을 분석해 원인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티칭프로로부터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들을 수 없자 스스로 자신의 스윙을 분석하기로 결심했다. 

1주일이면 스윙 분석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휴가를 얻어 매달렸으나 막상 해보니 너무 복잡했다. 1960년 보잉사에 사표를 내고 차고에 스윙스튜디오를 차려 본격적인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고 28년 후 초고가 완성되어 1969년 책으로 나왔다. 켈리는 기하학 물리학의 원리를 도입, 골프스윙을 도형으로 설명했는데 내용이 어렵지만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디섐보의 원 플레인 스윙도 이 책 영향이다.
각 클럽의 샤프트 길이를 7번 아이언과 같은 길이로 통일시킨 것도 나름의 과학적 분석과 실험의 결과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대회 제120회 US오픈 우승자 브라이슨 디섐보.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그는 유난히 야디지북을 자주 본다. 라운드 중 쉼 없이 캐디와 토론에 가까운 대화를 나누고 야디지북에 뭔가 열심히 적는다. 그린에서 퍼팅에 실패하고 나서도 야디지북에 뭔가 적는 것을 보면 실제로 자신이 체험한 라인이나 구배를 상세히 기록하는 것 같다.

그냥 막연한 감(感)에 의존하지 않고 경험, 실측, 통계, 확률 그리고 캐디와의 끊임없는 토론에 의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골프를 하는 것이다. 필드에서 논문을 쓰는 자세다.

그는 좋은 스윙 효과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실험재료로 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코로나19 여파로 PGA투어가 한참 쉬었다가 재개된 지난 6월 찰스슈왑 챌린지에 나타난 디섐보는 딴 사람이었다.

지난해 9월 시즌 종료 때 91㎏였던 몸무게를 110㎏까지 불린 헐크로 나타났다. 고열량 고단백 식사에 단백질 음료까지 마시고 웨이트트레이닝에 집중한 결과였다.

헐크로 변신한 그는 실제로 350야드 안팎의 드라이브샷을 날리며 2019-2020시즌 장타 1위에 오르더니 7월초 로켓 모기지 클래식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약 2개월 만에 첫 메이저 우승이자 PGA투어 통산 7승을 달성했다.

디섐보의 과학적 철학적 실험정신이 높이 평가받는 것은 US오픈에서 드러난 혁혁한 전과 때문이다.

디섐보의 최종합계 6언더파 274타의 성적은 단독 2위 매슈 울프와 6타 차이가 날만큼 압도적이다. US오픈 최종 라운드에서 홀로 언더파를 치고 정상을 밟은 챔피언은 1955년 잭 플렉(미국) 이후 그가 처음이다. 

다소 주춤했던 그의 변신에 대한 평가도 재조명을 받는 분위기다.

다음 대회에는 보통 사용하는 45인치(114.3cm)짜리 드라이버 대신 48인치(121.92cm)짜리 드라이버를 들고 나오겠다고 호언했다. 
그의 실험정신의 끝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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